이 달 초 받아본 프랑스 시사주간지 '누벨옵세르바퇴르' 표지에선 푸아투샤랑트 지방 의회와 정부를 새로 이끌게 된 세골렌 루아얄이 두 팔을 활짝 펼친 채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커버스토리 제목은 '좌파: 봄이다!'였다. 지난달 프랑스 지자체 선거에서 좌파가 압승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올해 51세인 루아얄은 여러 차례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사회당 소속 여성 정치인이다. 남편인 사회당 제1서기 프랑수아 올랑드와 함께 미래의 프랑스 대통령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커버스토리 본문을 찾아가 보니 루아얄이 이번에는 붉은 장미를 한아름 안고 환히 웃고 있다. 붉은 장미는 프랑스 사회당만이 아니라 전세계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상징이다.
15일 밤 총선 개표 방송을 보고 있자니, 민주노동당 최순영 당선자의 얼굴 위에 루아얄의 얼굴이 포개졌다. 세상에 대한 비슷한 꿈을 나누고 있을 이 두 동갑내기 여성은 사뭇 다른 과거를 지녔다. 루아얄은 20대 말에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비서실에 들어간 이래 내각과 의회를 오가며 호사스러운 정치 훈련을 받았다. 반면에 성장기 이후 최순영 당선자의 거처는 인간의 존엄성이 시시각각 위협 받던 노동 현장이었다. 최 당선자만이 아니라 이번 총선을 통해 국회에 들어가게 된 민주노동당 후보들 대다수는 매끈하지 않은, 실로 경의에 값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것은 민주주의적 진보정당이 제도정치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의 차이였다.
5·16 군사반란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 국회에 붉은 장미가 피었다. 그것도 한꺼번에 열 송이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우리 사회의 진보정치에도 작은 봄이 온 셈이다. 진보주의자들의 세계관에 온전히 공감하지는 않지만 우리 사회 정치적·이념적 지형이 정상화되기를 바라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을 축하한다. 그리고 당선자들을 포함해 이번 선거에 출마한 백수십 명의 민주노동당 후보들에게, 더 나아가 당원들 모두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들의 삶은 존경 받을 만한 삶이다. 좌우파의 정치적 충원 과정이 별다르지 않은 유럽과는 달리, 우리 사회에서 진보정당 당원이 된다는 것은 특별한 선택이고 자기반성적 결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안적 정치세력이 될 가능성을 민주노동당이 과연 지니고 있느냐 여부는 네 해 뒤에야 판가름 날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얻은 정당 지지율 13%가 곧바로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지분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섣부르다. 그 13%에는 기존 보수정당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발작적 혐오감이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물론 13%의 지지율을 가지고도 고작 3.3%의 의석 밖에 얻지 못하게 한 제도적 편파는 그것대로 시정돼야겠지만, 민주노동당이 대안적 정치 세력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지역구에서도 경쟁력을 발휘해야 한다. 앞으로 4년 간의 의정 활동이 민주노동당의 지역구 경쟁력을 결정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처음 경험하게 될 중앙 의회정치는 당 지도부에 지금까지보다 더 섬세한 기술적 세련을 요구할지 모른다.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라는 멋진 캐치프레이즈로 수렴될 수 없는 많은 미묘한 문제들이 민주노동당을 괴롭힐 것이다.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라는 대원칙은 그 실천 과정에서 이런저런 역설들과 맞닥뜨릴 수도 있다. 원내 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은 앞으로 잔글씨와 숫자에, 시적 표어보다는 산문적 현실에 좀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흔히 지적되는 노무현 대통령의 큰 약점 하나는, 언어는 과격하고 실천은 보수적이라는 것이다. 실천의 의지만 어기차다면, 굳이 언어의 급진성으로 자기정체성을 선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시 한번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을 축하하며, 네 해 뒤에는 더 많은 장미가 여의도에 피어나기를 기대한다. 봄이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