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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손끝-한국의 장인들]<12> 보자기 명장 김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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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손끝-한국의 장인들]<12> 보자기 명장 김현희

입력
2004.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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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기는 한국인이 세계에 자랑할만한 공예품이다. 색색의 자투리천을 이어붙여 만든 조각보는 현란한 색의 조합이 피에트 몬드리안이나 폴 끌레를 능가한다. 짐을 쌀 때면 평면은 입체가 되고 하늘하늘 속이 비치는 천으로 발을 늘이면 색유리 한 장이 부럽지 않다. 한국 자수와 보자기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려온 허동화(78) 사전자수박물관장은 보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장인으로 주저없이 김현희(58·노동부 명장)씨를 꼽는다. 김씨의 작품은 일본 고등학교의 가정 교과서 표지에도 실렸고 오스트리아 국립민속박물관에도 소장돼 있다. 그가 보자기 만드는 법을 강의하는 한국문화재보호재단 부설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와 예술의전당에는 일본인들도 배우러 온다.

"사람이 한 가지 재주는 다 타고 나잖아요. 나는 바느질에 재주가 있었고 그것만 죽자고 하니까 이런 자리에까지 이른 거지요."

김씨는 대전 유성 사람이다. 한국 동란 직후 다들 먹고 살자고 서울로 올라오던 1953년, 그의 가족도 서울로 올라와 마포구 창전동에 짐을 풀었다. 중학교 때 그림을 그리면 스승이 "고등학생보다 낫다"고 했고 붓글씨를 쓰면 "22년동안 가르쳤지만 이런 아이는 처음"이라고 했다. 손으로 하는 것은 뭐든지 잘했다. 그러나 "공부를 못해서" 꿈꾸던 미술공부를 할 수 없었다. 마침 창전동에는 조선 궁중 수방나인에게 자수를 배운 윤정식씨가 부녀자들을 상대로 자수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이곳에 김씨의 어머니(78)가 가서 배우기 시작했는데 김씨는 어머니가 가져온 수본을 보고 수를 따라놓았다고 한다.

어머니 편에 전해진 김씨의 자수를 본 윤씨는 '이 아이는 내가 끼고서 가르쳐야겠다'고 하더란다. 그 해가 64년으로 김씨는 기억한다. 이 해부터 윤씨가 정릉으로 이사간 68년까지 김씨는 거의 매일 윤씨의 집으로 가거나 윤씨가 김씨의 집으로 와서 자수를 배웠다. 처음에는 베갯모를 배우고 그 다음은 한문 전서를 놓았다. 자수만 배운 것이 아니라 활옷이며 흉배 같은 바느질의 모든 것을 익혔다. 윤씨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며 아껴주었다. 정릉으로 이사간 후에도 윤씨는 김씨를 가르치러 찾아왔고 나중에는 수본까지 물려줄 정도로 사랑했다.

김씨도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한시도 쉬지 않고 수를 놓았다. "수라는 게 수없이 놓아서 수라고 한답니다." 얼마나 수를 많이 놓았던지 엉덩이에 욕창도 생기고 팔이 시근거려서 침을 꽂고 잠을 청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창전동에 수돗물이 많이 보급되지 않을 때라 1남4녀 중 맏딸이었던 김씨는 당인리 화력발전소 자리에 있는 외물이라는 우물에서 물지게로 물을 져나르기도 했다. 수도가 보급된 후에도 지대가 높은 지역은 밤에나 물이 나왔다. 자정 넘어 나오는 물을 기다렸다 받으면서 그는 수를 놓곤 했다. 지금도 김씨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바느질을 하고는 저녁 먹은 뒤 2∼3시간을 잠들었다가 밤 10시쯤 깨서 새벽 2시까지 바느질을 한다.

당시만 해도 여자가 바느질을 잘하면 삯바느질로 연결되던 시대였다. 그러나 윤씨는 '네 바느질은 삯받고 팔 게 아니다. 작품을 하라'고 일깨워주었다. 김씨는 스승의 말을 따랐다. "먹고 살려고 꽃꽂이도 해보고 꽃집에서 쓰는 리본을 말아주는 부업도 했다"는 김씨는 밖에 볼일이 있어 나가면 주머니에 리본천을 잔뜩 넣고 가 걸어가면서도 리본을 접을지라도 자수로 돈 벌 생각을 안 했다고 한다.

김씨가 보자기만을 전문으로 하자고 마음 먹게 된 것은 마흔이 되면서부터이다. "일생에 한 길만 파도 다 못 할 테니 하나만 하자"는 생각에서였다. 86년부터 보자기에 집중하여 92년에는 보자기로 한국전승공예대전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사실 보자기는 수보도 있고 조각보도 있어서 자수도 잘해야 한다. 그가 94년에 한국전승공예대전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작품은 바로 이 수보와 조각보를 결합한 '화문수(花紋繡)조각보'였다. 가로 세로 4.5센티 짜리 청 백 비단 조각 128장을 이은 뒤 그 위에 화병을 수놓은 작품이다. 조각천을 이은 솜씨가 하도 정교해서 마치 그렇게 짠 천 같다.

최근 들어 가장 많이 하는 것은 역시 조각보이다. 크기가 다른 조각을 적게는 수십장, 많게는 수백장을 연결하는 조각보는 구성력이 탁월해야 한다. 김씨는 "처음에는 종이에 그림을 그려놓고 그에 따라 천을 잘라서 만들었는데 이제는 즉석에서 천조각을 잘라 이어도 좋은 구성이 된다"고 일러준다. 그렇게 해서 잘려진 천 가운데 남은 것은 또다시 다른 작품으로 탄생을 한다. 김씨는 "내가 버리는 것은 천 부스러기 뿐"이라고 했다.

조각보를 만들기 위해 김씨는 염색부터 직접 한다. 천연염색이 못 내는 색은 발광색 정도. 모든 색깔이 다 나온다. 천을 염색하고는 잘라서 잇는데, 이때 지키는 원칙이라면 얇은 천은 얇은 천끼리만 한다는 정도. 색은 세가지 색깔과 그 계열색 안에서 정해야 수선스럽지 않다.

조각보에 바닥천을 따로 대는 겹보는 감침질로 연결하여 상침으로 바닥천을 꿰매지만 속이 비치는 모시나 삼베 숙고사 항라 등으로 만들어 앞과 뒤가 똑 같은 홑보는 쌈솔로 천을 이은 뒤 감침질로 마무리한다.

조각보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역시 색의 조합이다. 꽃을 잘 기르는 김씨는 "자연에서 많이 배운다"고 했다. 단풍 든 오대산을 보고 온 다음에는 붉은 계통 천을 모아 '낙엽진 오대산'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주한 미 대사부인으로 한국문화를 미국에 소개하는데 힘써 온 리 슈나이더씨가 구매해 미국 하버드대 박물관에도 소장돼 있다. 일본에서는 94년 허동화씨 소개로 그의 작품이 전시된 후 보자기 바람이 불었다. 99년에는 일본에서 그가 쓴 '한국의 패치워크 보자기'라는 책이 출간됐다. 2002년에는 일본 NHK가 35분짜리 보자기 만들기 특강을 방영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김현희 제자'라고만 해도 알아준다.

김씨는 얼마전부터 보자기 강의만으로 생활이 가능하자 아예 작품을 팔지도 않는다. 최근 들어서는 조각보 위에 추상적인 수를 놓아 조각천이 아니면서 조각천 효과를 내는 새로운 시도도 하고 있다. 조각보 기법을 활용해서 액세서리도 만들어봤다. 그의 머리속에는 조각보만으로도 새로운 예술세계가 무궁무진하다고 한다. 그는 "아쉬운 게 있다면 우리 선생님처럼 모든 것을 아낌없이 물려줄 제자를 못 키운 것 뿐"이라며 "선생님이 저를 만난 게 예순다섯 때였으니 저도 아직은 시간이 있지요?"하고 웃었다.

/서화숙 편집위원 naticle@hanmail.net

● 김정혜·윤정식·김현희 사제3代

김현희씨의 스승 윤정식(1900∼2000)씨는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다. 김씨를 좀더 자세히 알기 위해 윤씨를 취재하면서 아름다운 인연으로 가득한 세상을 만났다.

윤씨는 개성의 정화여자소학교(정화여상의 전신)에서 처음 자수를 익혔다. 정화여자소학교는 대가집 마나님이었던 김정혜(1868∼1932)씨가 열일곱에 혼자 된 뒤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과부들을 사랑방에 불러 자수와 주산, 한글을 가르쳐 자립시킨 데서 비롯된 개성 최초의 사립여성교육기관이었다. 자수는 조선왕실의 수방나인까지 불러 가르쳤다.

가난한 집 소생으로 정화여자소학교에 입학했던 윤씨는 학교를 졸업하고는 이 학교의 자수 교사로 남았다. 그러나 재주가 비상한 것을 안타까이 여긴 김씨가 경기고녀에 입학을 시켰고 이어서는 도쿄여자대학교 동양자수과에까지 유학을 뒷바라지했다. 도쿄여자대학교를 졸업한 윤씨는 경북여고에 자수교사로 부임했다.

헌데 개성의 의사인 한철호(1889∼1966)씨가 대구까지 내려오면서 혼인을 간청해 교사 생활을 3년만에 접고 28년 개성에서 혼례를 치렀다. 이후 3남1녀를 낳으면서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 자수를 계속했다. 의사 소득 자체가 크게 많은 것은 아닌데다 한씨가 36년 유린보육원을 세우고 고아와 갈 곳 없는 노인들을 돌보는 복지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월남해서는 창전동에서 여전히 유린보육원을 운영했다. 이때도 바느질을 해서 윤씨는 자식을 공부시키고 보육원의 아이들을 건사했다. 이때 보육원을 도운 기업이 신도리코. 창업자인 우상기(1919∼2002)씨의 고모와 윤씨가 동향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윤씨는 신도리코의 지원에 대해 자수작품으로 답례를 한 것으로 제자인 김현희씨는 기억한다.

유린보육원은 나중에 정릉에서, 다시 신내동으로 옮겨갔고 독실한 원불교도였던 윤씨가 원불교재단에 헌납, 현재는 유린원광종합사회복지관으로서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다. 윤씨의 3남1녀는 의사와 교수로 성장했으며 셋째 아들이 서울시 의사협회장을 지낸 한광수(64)씨, 외동딸이 광운대 국문과 교수인 한지현(61)씨이다. 사위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이다. 김정혜씨도 신도리코도 윤정식씨도 이 미담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조각보처럼 이어져 세상을 곱게 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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