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7월 이호(李澔) 총재가 취임해 3년 임기를 연임한 6년 동안은 대한적십자사의 안정기였다. 한적은 정부의 협조를 잘 받고 아무런 사고 없이 발전했다. 나는 이 총재가 한적 중앙위원회에서 선출된 직후 사의를 표했지만 이 총재가 직접 같이 일하자고 해 6년 동안 모시게 됐다. 이 총재는 사무총장인 나에게 많은 일을 믿고 맡겼고 대외적으로도 나를 많이 내세웠다.이 총재는 알려져 있다시피 성품이 엄정하고 관록이 풍부한 분이다. 도쿄(東京)대를 졸업하고 초대 치안국장, 군 법무감(육군 소장), 법무장관, 내무장관, 주일대사 등을 역임한 뒤 한적 총재로 오시게 됐다. 과묵하고 원칙을 잘 지키는 분으로 일을 많이 벌이지 않고 수성(守成)하는 스타일이었다.
이 총재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무척 가까웠다. 나는 1년에 한두 번씩 이 총재를 모시고 청와대로 찾아가 명예 총재인 대통령에게 특별한 사항을 보고했다. 때때로 특별회비를 받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금일봉의 액수는 보통 30만원 정도였다. 76년인가 77년에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였다. 박 대통령이 나에게도 담배를 권한 뒤 이 총재와 흉금을 트고 많은 대화를 했다.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 등 외국정치인까지 논평하며 대단히 자신감에 차있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때 나한테도 "남북적십자 회담차 북한에 가본 걸로 아는데 어떻더냐"고 물었다. 나는 "북한은 지상, 지하의 모든 자원을 조직적으로 동원해 당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쓰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지 않습니까"라며 "사실은 불안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그런 점이 있긴 있지. 하지만 북한도 표면만 그렇지 이면은 그렇지 못해"라며 서가에서 인공위성으로 찍은 북한 사진을 꺼내 보여주었다. 박 대통령은 "산도 뻘겋고, 건물도 별 볼일 없어. 북한은 큰 공장 같은 조직인데, 공장이 중요한 기관 한 군데가 고장 나면 가동하지 못하는 것처럼 김일성(金日成) 한 사람에게 변화라도 있으면 북한은 어려워진다"고 했다. 나는 '박 대통령 본인도 강권 통치를 하면서 북한 체제를 그렇게 보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박 대통령은 이 총재가 청와대에 갔다 나올 때 현관까지 나와 배웅을 했다. 이 총재는 어느 날 나에게 "사석에서 만나면 박 대통령이 나를 형님이라고 부른다"면서 " 대통령이 '형님에게 국무총리를 맡기고 싶은데 하도 경상도 정권이라고 말들을 해서 못 시키고 있다'는 얘기를 한다"고 털어놓았다. 이 총재는 자신이 육군 법무감으로 있을 때 소장이었던 박 대통령의 어려운 사정을 부탁 받고 잘 해결해 준 적이 있다고도 했다.
어느 날 이 총재가 나를 부르더니 "모측에서 서 총장을 유정회에 데려가고 싶어 한다고 했다"면서 내 뜻을 물은 적이 있다. 나는 공화당 사전조직 참여를 권유 받았을 때처럼 "정치는 적성도 아니어서 전혀 생각이 없고, 여기 적십자가 내 천직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얼마 후 국제부장을 하던 윤여훈(尹汝訓)씨가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갔다.
이 총재는 한적 총재를 3번 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10·26 이후 정권을 잡은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이 총재를 입법회의 의장 자리에 앉혔다. 나도 그로부터 약 7개월 뒤 간염을 앓게 되어 사표를 내고 한적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여기서 청소년부장 시절부터 나에게 큰 힘이 되어준 한적의 좋은 선후배들께 감사의 뜻을 밝히고 싶다. 최두선(崔斗善) 이호 김용우(金用雨) 총재님과 김신실(金信實) 이범석(李範錫) 두 부총재, 김학묵(金學默) 전임 사무총장, 조철화(趙哲華) 전유윤(全裕潤) 이병웅(李柄雄) 후임 사무총장, 초기 청소년적십자 운동을 도와 같이 일한 박윤호(朴允好) 오봉렬(吳鳳烈) 양송배(梁松培) 배명창(裵命昌) 배창균(裵昶均) 양인기(梁寅基) 전의구(全義久) 김학규(金學奎) 김혜남(金惠南)씨, 인도법을 연구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최은범(崔殷範)군 등 후배 직원들, 박선규(朴善圭·충남) 김영진(金榮珍·제주) 박윤종(朴潤鍾·전남) 지사장의 노고와 우정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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