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정보기관들이 급변하는 환경에 맞춰 변화하려는 몸부림을 치고 있다. 과거 수십 년 동안 구 소련과의 냉전구도 하에서 정형화되다시피 했던 서방 정보기관들의 활동이 전기를 맞게 된 계기는 9·11 테러였다. 테러와의 전쟁, 이라크전을 거치며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 확산된 것이다. 최근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9·11 조사위원회 활동이 진행되는 속에서 연방수사국(FBI)과 중앙정보국(CIA) 등 미 정보기관들은 이미 실제로 대규모 개편작업을 가시화하고 있다. 영국 일본 호주 등 서방 주요 국가들도 미국을 반면교사로 삼아 정보기관 수술에 나섰다.
9·11 테러와 이라크전을 넘어
2001년 9월 11일, 세계 최강 정보력을 자랑하는 미국의 심장부에서 발생한 전대미문의 대형 테러로 인해 미국 정보기관들은 2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보실패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 테러집단 척결에 나섰지만 잊을만 하면 터지는 대형 테러는 이런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미국의 정보실패 논란은 이라크 전쟁을 둘러싸고서도 그대로 재연됐다. 전쟁 명분 중 하나였던 이라크 대량살상무기(WMD)가 전쟁이 끝난 지 1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자 정보기관들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이라크 전쟁은 옳았다는 고집을 꺾지 않고 있는 미 행정부도 일부 정보 오류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정보기관들의 무능력에 돌렸다. 자연스럽게 정보기관 구조 개편 필요성이 대두됐다.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변신을 요구 받고 있는 정보기관들의 고민은 테러집단 알 카에다로 상징되는 적의 실체가 과거처럼 뚜렷하지 않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정보기관들은 이곳 저곳에서 들어오는 흐릿한 정보들을 취합해 대응책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처럼 10여개에 이르는 정보기관들이 각기 활동영역을 정해 임무를 수행할 경우 문제는 복잡해진다. 9·11 이전 미국 각 정보기관들이 습득한 정보의 양이 부족했다기보다는 정보들을 공유하고 효율적으로 관리, 분석할 구조가 마련되지 못했다는 것이 미국의 판단이다. 14일 9·11 조사위가 펴낸 보고서는 "현 체제에서는 정보기관들이 협력, 공조하고 정보를 공유할 유인책이 없다"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정부가 15개에 이르는 정보기관들의 예산 및 인사, 관리에 관해 통제권을 행사하는 새 직책의 신설을 고려 중이라고 전했다. 현재는 조지 테닛 CIA 국장이 정보기관들을 통합 관리하는 지위에 있으나 정보 관련 예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방부 산하 정보기관들에 대해선 사실상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통합과 확대에 초점
테러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각국의 움직임은 정보수집 통로의 통합과 함께 정보수집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보기관 확대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냉전이 끝나면서 역할이 축소됐던 정보기관의 위상과 권한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국제 테러와 북한의 위협 등에 대처하기 위해 현재의 내각 정보조사실을 총리실 직할 정보기관으로 확대, 개편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새 정보기관은 CIA나 이스라엘의 모사드를 모델로 삼아 현재 150명 규모인 요원 수를 1,000명 규모로 키우는 게 골자다. 2006년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일본이 본격적 정보기관을 갖게 되면 이는 2차대전 후 처음이다. 이시바 시게루 방위청 장관은 "각 부처에서 여러 가지 정보가 올라오지만 대응은 제각각"이라며 통합 정보기관 설립 필요성을 강조했다.
호주는 최근 테러와의 전쟁 수행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최대 정보기관인 '호주안보정보기구'의 요원을 25% 증원키로 하고 기구 개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존 하워드 호주 총리는 "테러와의 전쟁은 전통적 의미의 전쟁과는 달라서 정보기관의 강화가 필수적"이라며 전폭적인 예산 지원까지 약속했다. 신무기 개발 등 군비 강화로 상징되는 냉전식 대처보다는 정보의 수집 관리가 중요하다는 인식이다.
미국에 버금가는 테러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영국은 점증하는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현재 2,000명 선인 국내정보국(MI5) 인원을 향후 3년 간 50% 증원키로 하는 한편 예산도 50% 증액했다. MI5는 2차 대전 이후 기능이 지나치게 약화됐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영국은 또 이와 함께 미 FBI를 모델로 하는 조직범죄 전담기구를 2006년까지 신설키로 했다. 기존 정보기관과 수사기관 3개를 통폐합할 '중대조직범죄청'은 최정예 요원 5,000명으로 구성되는 방대한 규모와 함께 도·감청 허용 등 막강한 수사 권한도 갖게 된다.
/진성훈기자 bluejin@hk.co.kr
■"빅 브라더는 안돼" /정보총수 신설 추진에 미국내 찬반양론 가열
9·11 테러 진상조사위원회 활동으로 미국 정보기관의 부실한 현 주소가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정보 기관 개혁 방안을 둘러싸고 뜨거운 논란이 불붙고 있다.
특히 지난 주 백악관이 정보 총수직 신설, 국내 정보 전담기관 창설 등 급진적 처방을 들고 나오면서 개혁 논의가 점진적 변화 (evolution)에서 혁명적 변신(revolution)으로 급선회하는 상황이라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큰 변화를 요구하는 측은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의 자체 개혁이 지나치게 더디고 관료주의와 조직 이기주의로 한계가 명확하다고 주장한다. 몇 년째 지지부진 한 테러용의자 리스트 통합 작업, 테러위협통합센터(TTIC)에 대한 불분명한 책임소재 등 테러 대응 능력이 9·11 이후에도 별로 개선된 게 없다는 것이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4월19일자에서 "테러 정보의 수집, 분석, 공유 방법에 대한 철저한 해부가 필요하다는 게 대부분의 생각"이라고 보도했다
이런 분위기 아래서 정보기관의 예산, 운영 등을 통할하는 정보 총수 즉 '정보 짜르'를 신설하는 방안이 급격히 세를 넓히고 있다. FBI는 당초 조직 내부에 체포권 등 법 집행력 없이 국내 정보 수집만 전담하는 기관의 설치를 구상했었다. 그런데 최근 백악관 내부에서 지난해 사장됐던 15개 정보기관의 인사, 예산, 관리 등을 통할하는 정보 총수직 방안이 급부상했다.
독립적 국내 정보기관 창설 방안도 힘을 얻고 있다. FBI는 전통적 범죄에만 힘을 집중하고 국내 정보는 영국의 국내 정보기관인 MI5와 유사한 독립적 정보기관을 신설해 담당토록 한다는 구상이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주자였던 존 에드워즈 상원의원도 이 방안을 강력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보 총수 및 독립 국내 정보기관 신설 주장은 미국 사회가 '빅 브라더'의 손에 들어가는 것 아니냐는 강한 우려와 반발을 낳고 있다. 결국 미국 시민에 대해 비밀 활동을 벌이고 사생활을 파헤치며 법적 근거 없는 정보 수집과 감시를 자행하는 비밀 경찰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미국 시민자유연맹(ACLU)은 17일 "CIA가 해외에서 하는 더러운 술책을 미국 시민을 상대로 하려는 것"이라며 "냉전 때도 헌법을 넘어서는 비밀 경찰 창설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전현직 FBI 요원 협회(FBIAA)도 "테러 범죄의 성격을 무시한 발상이자 불필요한 옥상옥 구조를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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