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적십자사의 활동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이 자원봉사조직의 활동이다. 내가 사무총장이 된 후 이미 운동이 활발했던 청년· 부녀층 뿐만 아니라 장년층으로 자원봉사 활동을 확대했다. 특히 60세 이상을 '이순(耳順) 봉사회'라고 따로 모집했더니 각계에서 활동하던 저명한 인사들이 많이 참여했다.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대구사범 시절 은사인 김영기(金永驥) 선생, 서울교대 학장을 지낸 원흥균(元興均) 선생, 문교부 국장을 오래 한 김옥성(金玉成)씨 등 수백 명이 열심히 봉사에 앞장서주었다. 하루는 김영기 선생이 돈암동 자택으로 나를 불렀다. 선생은 "우리 나라에 무(武)는 이순신 장군을 위해 현충사를 건립해 성역화 했는데, 문(文)에 있어서는 그런 분이 없으니 세종대왕릉(경기 여주 영릉)을 성역화 하도록 대통령에게 건의를 하자"면서 나더러 건의문을 쓰라고 했다. 그래서 영릉 성역화 건의문을 길게 초하여 붓으로 써서 김 선생 이름으로 보냈다. 4,5일 후에 박승규(朴升圭) 민정수석이 김 선생 댁으로 박 대통령이 친필로 쓴 회답 서한을 가져왔다. 김 선생이 나를 불러 서한을 보여주었다. 노란 봉투에 "참으로 선생님이 좋은 건의를 해 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뜻을 받들어 그렇게 하겠습니다"하는 요지의 편지가 2장 들어 있었다. 그 1년 후에 영릉이 성역화 됐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당시의 영부인인 육영수(陸英修) 여사도 적십자 활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적 본사 부녀봉사자문위원회가 매주 적십자 강당에서 불우이웃을 위한 선물도 만들고 재봉 봉사도 많이 했는데, 육 여사는 매월 빠짐없이 작업장에 한두 번씩 나오셔서 봉사를 했다. 얼마나 재봉을 잘하는지 장관이나 기관장 부인들이 육 여사의 절반도 쫓아가지 못해 쩔쩔 매기도 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육 여사가 봉사를 나온다고 하면 당시 김용우(金用雨) 총재와 사무총장인 나, 그리고 간부들이 현관에 나가서 영접을 했는데 그러지 말라면서 '오늘은 바쁜 일이 있어서 못 나간다'라고 전화를 해놓고 몰래 비서 한명만 데리고 오후 작업반에 와서 봉사를 하고 가시곤 했다. 또 박 대통령에게 말씀을 드려 청와대의 모든 직원들이 헌혈을 하게 했고, 여러 번 적십자혈액원에 와서 헌혈을 했다. 헌혈할 때도 영부인 대우를 한다고 피를 50g 정도만 뽑으면 더 뽑으라고 해 수백g씩 헌혈을 했다. 적십자병원이 있던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 낙도의 환자 수송을 위해 배가 필요하다고 하자 '백련호'(白蓮號) 라는 병원선을 기증해주었다. 그러나 섭섭하게도 이 배를 건조하도록 주문해 놓고는 1974년 8월15일 흉변을 당해 서거했기 때문에 9월의 진수식에는 따님인 박근혜(朴槿惠)씨가 대신 와서 나와 함께 테이프를 끊은 기억도 난다.
적십자 사업이 확장됨에 따라 73년 봄에 신년도 적십자 회비를 38% 올려달라고 정부에 요청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무부에서 그것이 너무 많다고 반대하자 김종필(金鍾泌) 총리가 지금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고 있는 고건(高建) 내무부 지방행정국장과 박승복(朴承福)행정조정실장, 그리고 나를 총리실로 불렀다. 김 총리가 "한적이 하는 일이 많으니 요청대로 회비를 거두라"고 지시했는데도 고 국장은 "안됩니다. 세금도 물가도 10% 내외 인데 38%는 무리입니다"라고 했다. 김 총리가 강한 어조로 다시 반복했는데도 고 국장은 "적십자 회담 한다고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국민도 납득 못합니다"하면서 완강하게 버텼다. 그래 내가 "우리가 나가서 행조실장과 협의하겠다"고 해 밖으로 나왔다. 내가 "30%이상은 돼야 한다"고 했더니 고 국장이 "그럼 32%로 하자"고 물러섰다. 그 해 회비가 많이 증액되어 적십자 사업에 활기를 띄게 됐다
70년대 한적의 봉사활동 중 언청이 무료성형수술을 빼놓을 수 없다. 특별히 한서대 설립자인 가톨릭대 병원의 함기선(咸基璇) 박사가 열심히 해주었다. 적십자병원, 연세대 의대, 카톨릭대 병원 등이 협력해 총 2,589명을 무료 수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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