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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30> 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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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30> 미진

입력
2004.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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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는 별식이다. 잔칫날 빼놓아서는 안될 의례음식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 신행길에 오른 신부가 시댁에 도착하면 신랑은 신부를 부엌으로 데려가 바가지에 국수를 담아 주걱으로 떠먹여 주는 풍습이 있었다. 술술 넘어가는 국수처럼 시집살이를 수월하게 넘기고 오래오래 함께 살자는 의미였다. 지금도 돌 차림상에는 빠짐없이 국수가 오른다. 국수는 장수를 상징하는 음식이다. 자식의 장수를 기원하는 어머니의 정성이 긴 국수발에 담겨 있는 것이다.

국수의 주재료는 본디 메밀가루였다. 곡식으로서 메밀은 오곡의 축에도 끼지 못하지만 메밀가루로 뽑은 국수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실제로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메밀을 국수 가운데 으뜸으로 쳤고 온면이나 냉면으로 말아 곧잘 점심 수라상에 올렸다. 밀가루가 흔치 않던 시절 국수라면, 으레 메밀국수를 지칭했다.

교보빌딩 뒷편의 미진(美進)은 메밀국수로 반세기 동안 고객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물론 이 집의 메밀국수는 한국음식이 아니다. 우리에게 '소바(蕎)'로 알려진 일본음식이다. 메밀은 물론, 메밀가루로 국수를 내는 방법이 우리나라에서 건너갔으니 일본식 메밀국수는 우리가 역수입한 음식인 셈이다. 메밀국수의 맛은 양념장에 달려 있다. 국수도 쫄깃쫄깃한 맛이 살아날 정도로 알맞게 삶아져야 하지만 국수에 찍어먹는 양념장이 맛을 좌우한다. 단골들이 말하는 미진의 감칠맛은 잘 삶아진 면발과 양념장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풍미다.

"우리는 '미진공식'에 따라 양념장을 만듭니다. 들어가는 재료만 14가지나 됩니다." 미진의 두 번째 주인 이영주(李暎珠·66)씨도 맛의 비법을 양념장에서 찾는다. 양념장 만들기의 첫 단계는 무 다시마 쑥갓 파 등을 넣고 삶는 것이다. 그런 다음 이른바 미진공식에 따라 멸치 가다랭이 등 다른 재료를 순서대로 넣고 끓이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다.

메밀을 재료로 한 음식은 국수 외에도 메밀묵, 비빔냉면, 메밀총떡이 있다. 지하에 국수를 뽑는 시설을 갖춰 놓고 있다. 메밀은 평창 봉평 등 강원산을 주로 구입한다. 메밀국수는 계절음식이다. 여름철 한철이 성수기라 메밀국수 한 종류만 갖고는 현상유지도 어렵다. 그 해결책으로 음식의 가짓수를 늘렸다. 한때는 젊은 세대를 위해 저녁에 생맥주까지 팔았다.

미진의 창업자는 고 안평순(80년 60세로 타계)씨다. 이씨는 스스럼 없이 '고모'라고 부르는 안씨와의 만남을 숙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78년 미진을 인수했다.

"자식이나 다름 없는 가게다. 너에게 줄 테니 늘 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잘 이끌어가라. 부디 미진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고 잘 지켜주면 좋겠다." 건강이 기울어 가던 안씨는 눈물을 쏟으며 미진을 맡겼다. 당시 이씨는 북창동에서 대형 일식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안씨가 가끔 들리면서 인연이 닿았다. 둘은 자연스럽게 마음을 터놓는 사이로 발전했고 이씨는 안씨를 '고모라고 부르게 됐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의 관계였지만 친정 어른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이씨는 언젠가 "저도 고모님처럼 깨끗한 메밀국수집이나 했으면 마음고생이 덜 하겠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우연히 주고 받은 그 대화를 고인은 마음 속에 묻어두었다가 자신의 삶을 정리하면서 이씨에게 미진을 넘긴 것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한 이씨는 음식장사는 꿈도 꾸지 못했다. 결혼 후에도 국영기업체에 근무하는 남편 덕분에 생활에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남편이 직장 일에 적성이 맞지 않아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장래에 대비하자는 생각에서 일식집을 차렸다. 미진을 넘겨 받은 이씨는 보다 넓은 공간을 찾다가 현재의 자리(60평)로 이전했다. 며느리가 곁에서 거들며 대를 이을 준비를 하고 있다.

안씨가 지금의 교보빌딩 자리에 미진을 연 때는 54년. 영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종로의 대로변으로 옮겼다. 안씨는 한때 일본에 거주하면서 메밀이 건강식품이라는 점에 매료돼 조리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 분은 성격이 무척 깔끔했습니다. 메밀국수도 성격처럼 단백하고 맛깔스러워 장안의 명사들이 단골로 드나들었거든요." 이씨는 늘 한복차림의 고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음식점은 물론이고 그 주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무척이나 인색하던 시절이었지만 안씨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서울에서 제일 맛 있은 음식을 내놓는다는 긍지를 잃지 않았다. 미진의 손님 역시 최고의 명사라고 여겼다. 그런 마음가짐과 단아한 성품이 어우러져 미진은 자연스럽게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미진의 고객은 대부분 단골이다. 개업 때부터 드나들던 단골이 무척 많다. 박정희 전대통령도 생전에 미진의 메밀국수를 즐겼다. 안씨는 물론이고 이씨도 주방장을 대동하고 여러 번 청와대에 들어갔다. 무용가 고 김백봉 여사는 미진의 찬미자였다. 단골음식점을 물으면 늘 미진을 꼽았다. 말년을 청주에서 보냈던 고 김기창화백은 서울에 올라올 때 마다 미진을 먼저 찾았다. 일년에 300일 넘게 오는 단골도 여럿 있다.

영업환경이 변하면서 이씨는 포기여부를 놓고 여러 번 힘든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럴 때마다 '고모'의 얼굴이 떠올랐고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곤 했다. 미진은 창업 50주년을 맞아 체인화를 시도하고 있다. 보름 전 김포시에 첫 분점을 냈다.

미진을 찾는 단골들은 메밀국수 가닥에 추억을 함께 섞는다. 맛에 대한 믿음이 늘 변함없기를 바라면서.

이기창 편집위원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메밀가루로 국수 뽑는 법 조선의 스님이 日에 전해

일본사람은 메밀국수를 가장 즐기는 민족이다. 우리와 달리 메밀국수는 사계절 음식이나 다름없다.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메밀이 일본에 전래된 시기는 8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메밀로 국수 만드는 방법을 배우기 전까지 일본인들은 그저 메밀가루를 뜨거운 물에 넣어 죽처럼 조리해 먹거나 경단처럼 만들어 삶아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메밀가루로 국수발을 뽑는 방법을 가르쳐 준 사람은 조선시대 원진(元珍)스님으로 기록돼 있다. 원진스님은 1624년부터 약 20년간 일본의 한 절에 머물면서 메밀가루로 국수를 내는 방법을 전했다. 원래 메밀가루는 끈기가 있지만 열을 가하면 점착력이 약해지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국수를 만들 때 메밀과 밀가루를 7대3의 비율로 섞는다. 밀가루의 비율이 더 높아도 된다. 원진스님은 일본인들에게 이런 방법을 알려준 것이다. 머지 않아 메밀국수는 일본 전역으로 퍼져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는 음식으로 자리잡게 됐다.

메밀은 건강식품으로 다이어트에도 좋다. 100g을 기준으로 할 때 메밀국수의 열량은 318㎉로 라면의 2분의 1에 불과하다. 단백질 함유량이 12%이상으로 다른 식품보다 월등히 높다. 필수아미노산인 리신, 모세혈관의 저항력을 높이고 뇌출혈에 의한 혈관손상을 막아주는 루틴의 함유량도 풍부하다. 조선시대의 요리서 '음식지미방'에 따르면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면이라고 기록, 밀가루국수보다 널리 먹었던 음식임을 말해준다. 국내에서는 강원도와 북한의 함경·평안도가 주산지로 메밀국수로 만든 막국수나 냉면이 향토음식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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