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생명의 전화 자살예방센터(02-763-9193∼5·www.lifeline.or.kr). 자살을 염두에 둔 사람들이 마지막 호소를 해 오는 곳이다. 상담원들은 이들과의 전화통화에서 최대한 삶의 희망을 불어 넣는 전도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19일 오후 센터에 들어서자 중앙에 칸막이로 막아놓은 전화부스 4곳이 한눈에 들어온다. 안에서는 상담원들이 연신 울려대는 전화 벨 소리를 따라 수화기를 들고 쉴 새 없이 대화를 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머리 속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꽉 차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고, 그냥 모든 것에 의욕이 없습니다." "얼마나 상황이 어려웠으면 죽음밖에 생각 나는 게 없겠습니까. 선생님을 돕고 싶은데 죽고 싶어하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지요." 이렇게 시작된 20대 남성과 상담원의 대화는 시간이 조금 지나자 오랜 지기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다른 부스로 전화를 걸어 온 19세 실업계 여고 3년생.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자살을 꿈꾸고 있어요. 아직 시도한 적은 한번도 없지만 1년 전부터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일기에 자살이라는 단어도 많이 쓰고요. 그냥 세상살기가 싫어요."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힘들게 하나요." "나를 둘러싼 여러 상황이 모두 싫어요. 실업계 고교는 취업할 때 외모가 중요한데 나는 예쁘지도 않고, 또 가족이나 주변 친구들도 저를 싫어하는 것 같고…." "외모문제는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한번씩 고민할 수 있습니다. 예쁘지 않다고 당신이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에요.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 보세요."
급박한 상황을 알리는 전화도 걸려온다. "남자친구가 제 친구랑 사귀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제 손목에선 피가 나오고 있는데. 왜 난 죽지 않는 거죠?" 30대 여성의 전화를 받고 상담원은 최대한 통화를 길게 끌면서 다른 직원에게 이 사실을 알려 경찰 및 119에 신고토록 했다.
자살 광풍이 거세게 불어오고 있다. 경찰청 집계에 따르면 1994년 7,000여건에 불과하던 자살 건수가 지난해 1만3,000여명으로 늘었고 올해도 증가추세는 이어지고 있다. 5분만에 1명씩 자살을 시도하고, 45분만에 1명이 목숨을 잃고 있는 셈이다. 자살 관련 생명의 전화 상담 건수도 2002년 631건에서 지난해 1,165건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표면적인 자살 건수의 증가보다 실행에 이르는 동기 부분의 변화에 있다. 실제 상담센터에 걸려오는 전화내용도 뚜렷한 이유없이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의 상담이 상당수에 이른다.
예방센터 하상훈(44) 원장은 "몇 년 전만 해도 카드빚, 가족 붕괴 등 절박한 이유로 자살을 택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최근에는 본인의 명예실추나 외모, '왕따' 등으로 자살 원인이 확산되고 있고, 특별한 이유없이 무력감을 느껴 자살에 이르는 사례도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의 투신자살과 구치소에서 목매 숨진 안상영 부산시장, 한강에 투신한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 자신이 운영하는 학교 집무실에서 투신한 김인곤 광주대 이사장 등의 자살은 기존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건으로 사회전체에 큰 충격을 줬다.
또 왕따 동영상 파문이 있었던 학교 교장, 학교체벌 참고인 조사를 받던 보건교사, 비리 수사를 받던 군인 등 사회적 비난이 쏟아졌던 사안에 연루된 사람들이 문제 해결의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살을 택했다.
이런 가운데서 사회는 오히려 자살을 부추기고 있다. 최근 급증한 인터넷 자살 사이트를 통한 자살 권유 및 집단자살이 대표적이다.
지난달 22일 인터넷 자살사이트에서 만난 5명의 남녀가 경기 수원의 한 모텔에서 음독 자살했고, 지난 14일에도 경기 안산의 한 모텔에서 자살사이트를 통해 만난 것으로 추정되는 20대 남녀 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달 말에는 생면부지의 세 남녀가 카드 빚과 남자친구의 변심 등을 이유로 자살을 실행에 옮기려다 경찰에 적발돼 무위에 그쳤다. 이들은 벌써 올해에만 3차례 자살을 시도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예방센터의 한 상담원은 "최근 유명인들의 자살이 증가하면서 '저런 사람도 죽는데 나 같은 사람이 살아 무엇하냐'는 내용의 상담이 늘어나고 있다"며 "자살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듯한 언론보도 및 사회적인 분위기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문제해결의 방법으로 소외계층에 대한 전 사회적인 관심이 우선시되는 분위기 조성이 급선무라고 입을 모았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안정감이 자살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도 분배돼 갈 때 비로소 자살왕국의 오명을 씻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연세대 의대 정신과 고경봉(56) 교수는 "자살 예방의 방법으로 인터넷 자살사이트 등에 대한 관리 감독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인명이 중시되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신재연기자 poet333@hk.co.kr
■ 외국의 자살방지책
프랑스 파리에 있는 에펠탑은 '자살자의 탑'으로 불린다. 완공 이후 지금까지 379명이 투신 자살했다. 자살 장소로는 프랑스 최고라는 통계도 있다. 프랑스는 한 해에만 1만2,000여명이 자살하고 있다. 스위스도 세계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은 나라에 속한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자살로 인한 사망은 연간 1,300여건으로 교통사고 사망건수(516건)의 2배가 넘는다. 반면 유럽내 빈국(貧國)으로 꼽히는 그리스의 자살사망률은 유럽에서 가장 낮은 편이고, 교통사고 사망률은 가장 높다.
이처럼 선진 국가들의 높은 자살률은 자살이 생계의 곤란함이 아닌 삶에 대한 불안과 회의, 고독, 명예실추 등 심리적이고 비경제적인 이유에 있다는 방증이다. 우리의 경우도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자살사망률이 교통사고 사망률을 제치면서 '선진국형 자살시대'로 접어들었다.
선진국형 자살은 국가기관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로 그 책임이 모아진다. 자살률이 높은 오스트리아의 경우 1980년대 지하철 자살이 급증하자 87년부터 자살 사실과 방법에 대한 언론 보도를 자제케 했다. 그 결과 자살률은 크게 줄었다.
프랑스의 경우는 사회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하다. 자살예방전국연합은 매년 '자살 방지의 날'을 정해 30여 개 도시에서 회원들이 캠페인을 벌인다. 젊은 층이 실업문제와 학교 폭력 등 소외문제로 자살하고 있다고 보고 계몽운동을 펼친다.
국가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나라들도 많다. 1분에 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자살이 급증하고 있는 중국은 '베이징(北京) 심리위기와 관여센터'에서 국가차원의 자살방지계획을 수립 중이다. 하루 평균 100명이 목숨을 끊는 일본의 경우는 2001년 일본 후생노동성이 민간자살예방단체인 생명의 전화에 1억엔을 지원한 후 자살대책을 일임했다. 미국은 국가 차원의 자살예방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홍석우기자
■분당 서울대병원 하규섭 교수/"주위의 관심·대화가 예방책"
"정상적인 방법으로 문제 해결이 되지 않을 때 선택하는 게 범죄와 자살입니다. 자살의 증가는 그만큼 우리사회가 병들어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분당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하규섭(사진) 교수는 최근 늘어나고 있는 자살의 원인을 우리사회의 구조적 문제에서 찾았다. 실제로 우리보다 자살사망률이 높은 스위스나 덴마크 등은 자살이 감소 추세인데 비해 한국은 1990년대 초 이후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2003년 자살사망률은 인구 10만 명당 19.1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4위이다.
하 교수가 설명한 우리사회의 자살 유발요인 중 가장 심각한 것은 빠른 사회변화 과정 중에 생겨난 극단적인 사회분위기다. 공통의 가치가 붕괴되면서 '내가 선이면 너는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만연해 사회구성원 간의 합리적인 대화가 없고 일방적인 비난만 있다는 것이다. 그는 왕따 동영상 파문으로 자살한 교장의 예를 들었다. "사회적으로 지탄만 했지 누가 교장의 입장이나 속사정에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나요. 자신은 결백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 선택한 게 자살입니다."
물론 자살의 원인은 다양하다. 학력이나, 명예, 신념 등 자존심에 상처를 받거나 목표에 못 미칠 때,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았을 때 등 여러 이유로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서 대화보다 자살이 훨씬 손쉬운 문제해결의 방법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는 잠재적인 자살자를 더욱 충동적으로 만든다는 게 하 교수의 지적이다. 심하면 연쇄 자살을 유발하거나 분신 등 외부에 어필할 수 있는 자극적인 방법으로 치닫기도 한다.
사회적인 원인 외에 개인적인 이유도 크다. 자살자의 60% 이상이 우울증, 완벽주의, 충동적 성격이거나 지나치게 예민한 성격 등 잠재적인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하 교수는 자살은 충분히 줄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자살자의 80% 이상은 죽기 전에 주변에 직·간접적으로 알립니다. 끝까지 살고 싶어하는 게 자살자의 일반적인 심리지요. 가볍게 넘어가지 말고 주위에서 끊임없는 대화를 하면 예방이 가능합니다." 그는 학교 차원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주고 언론에서 신중한 자살보도를 하면 자살은 크게 줄어든다고 강조했다. 자살에 대한 언론 보도 후 모방 자살을 할 확률이 영화보다 4.03배 높으며, 이런 보도내용이 자살자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 많기 때문이다.
/홍석우기자 muse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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