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중반 경기 수원의 한 가난한 가정집. 얼마 동안 잠을 잤을까. 소년이 부시시 눈을 떴을 때 어머니의 나직한 숨소리만 들려왔다. 모두가 잠든 으슥한 시간, 희미한 등잔 아래서 어머니는 그때껏 바느질중이었다.어머니의 숨결에 따라 커졌다 작아졌다 하늘거리는 등잔불빛, 그 너머로 어른거리는 어머니의 옆 얼굴. 소년의 입에선 ‘엄마, 이제 주무세요’라는 말이 맴돌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겨우 네살. 말을 채 배우지 못한 소년은 그저 눈만 껌뻑거렸다.
소년은 이후 남부럽지 않은 산부인과 의사로 성장했다. 해방 전후의 격변기와 근대화의 혼란기를 겪고 인생을 관조할 나이에 이르렀을 때 그는 자신의 사재를 모두 털어 등잔박물관을 열었다. 말도 채 다 익히지 못했던 그 시절, 등잔불 아래서 본 흐릿한 어머니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 순금의 기억으로서 그의 가슴 속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김동휘(86)옹. 산부인과 병원 건물을 처분해 얻은 9억원으로 1997년 경기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일대에 세운 등잔박물관은 그가 40여년 동안 모아온 등잔 200여점과 사발, 도자기 등 민속품 3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삼국시대의 토기등잔에서부터 고려시대 청동촛대, 200년전 결혼식 때 밝혔던 화촉 등 갖가지 등잔이 자신만의 빛깔을 낸다. 750여평의 대지 위에 지하 1층, 지상 3층, 건평 280여평 규모로 들어선 박물관은 외형적으로만 보면 작은 규모지만, 지난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우리의 숨결이 집약돼 있는 곳이다.
등잔이 뭐길래
대체 등잔이 뭐길래 박물관까지? 사실 김옹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1950년대부터 그가 등잔을 모으기 시작하자 주위사람들은 한결같이 의아하게 생각했다. 집집마다 전기불이 보급되면서 등잔은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거나 기껏해야 고물상에 헐값으로 팔려나갔기 때문이다. 김옹은 인사동에서도 손님 대접 못 받는 불청객이었다. 돈 안 되는 등잔만 찾아다니며 창고를 뒤지기 일쑤였던 탓이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등잔이었지만, 그에게는 어떤 민속품보다 소중한 유물이었다. “등잔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말을 걸어와요. 제 어머니에 대한 기억처럼, 등잔에는 그 불빛 아래서 밤을 밝혔던 사람들의 모습이 어려있는 거죠. 고요한 등잔 불빛 속에 있으면, 상상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같아요.” “등잔은 똑 같은 게 없지요. 가정마다 자기가 쓸 등잔을 직접 만들었기 때문에 저마다 제 각각의 개성을 담고 있어요.” “등잔 불빛은 천한 사람, 귀한 사람 따지지 않고 보배 같은 빛을 모두에게 나누어주죠. 한번 보세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등잔에 대한 그의 찬사는 그칠 줄 모른다. 그에게 등잔은 삶의 철학이나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추스리려는 소중한 희망이다. “추운 방일지라도 등잔 불빛 아래서 우리 마음은 훈훈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더운 방에 있어도 마음은 차갑지요.”
등잔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김옹은 70년대초 처음으로 등잔 전시회를 개최하며 등잔의 가치를 세상에 알렸다. 당시 언론 매체에도 크게 보도되면서 고물 취급 받던 등잔이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 덕분에 등잔 가격이 크게 뛰고, 사람들이 등잔을 쉽게 내놓지 않아 수집하는데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사실 김옹이 등잔에만 큰 애정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김옹은 수원 지역에선 문화계의 큰 어른이었다. 1940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54년부터 80년까지 수원에서 산부인과 병원을 운영하면서도 갖가지 문화 관계 일을 뒷바라지하거나 주도한 지역 문화계 주역이었다. 동료 문화인들과 함께 수원예총과 난파음악제를 창설했고, 수원문화원의 문화학교 교장도 맡았다.
1989년부터 시작된 수원 화성 행궁 복원에도 큰 역할을 했다. 행궁 복원추진위원장을 맡아 정부와의 오랜 싸움 끝에 얻은 성과물이었던 것. 사진에도 일가견을 가져 대한민국 국전에서 사진으로 4년 연속 특선에 입선하기도 했다.
이제 그의 삶을 정리할 단계에서 그의 마음은 등잔 하나로 모아진다. “마음이 캄캄하면 우리 미래도 캄캄해지지요. 캄캄한 우리의 마음을 밝힐 무엇을 찾아야죠. 등잔불처럼요.”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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