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끝났다. 선거가 무슨 연극일 수 없지만 천막 당사, 삭발, 눈물, 단식, 삼보일배, 이벤트, 선심성 공약이 남발된 이번 총선은 연극정치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듯하다. 이제 정치 연극은 관객의 냉혹한 평가 속에 막이 내렸고, 극장 밖의 엄연한 경제적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그래도 이번 선거는 민주적 절차와 방법이 강조되고 돈과 관권의 개입이 거의 없는 선진적 수준이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보여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아울러 진보진영이 요구해 온 새의 두 날개 가운데 한쪽 날개 역에 대하여 이번에는 보수 진영이 다른 한쪽 역을 요구하고 나왔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서 '두 날개' 논리 자체는 존재가치를 확고히 인정받게 되었다. 탄핵 역풍에 설 자리를 잃어버린 듯한 야당이 새는 두 날개로 난다는 논리에 매달려 부활한 것이다.
그러나 보수든 진보든 한국 경제 2만 달러 목표 달성을 위한 새로운 돌파 전략은 보여주지 못하였다.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의 민주화'는 바람직하나 경제적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경제 성장 전략 부재 현상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한국 경제의 부진은 지난 1년 사이에 나타난 현상이라기보다 어떤 점에서는 1990년대 중반 이후 10년간의 현상이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시대를 점철해온 외채 위기, 카드채를 비롯한 내채 위기, 그리고 경쟁력 위기는 한국 민주주의 성장 전략 부재 현상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누가 보아도 2만 달러의 언덕이나 동북아 중심 국가의 가능성보다는 400만 신용불량자와 청년실업자의 홍수, 중산층의 붕괴와 소득 불평등의 심화, 산업공동화와 외국투자 감소, 설비투자와 연구개발(R& D) 투자의 현저한 감소, 신산업 육성의 지연, 산업 경쟁력 위기가 눈앞을 가리고 있지 않는가.
이번 선거에서 보수든 진보든 간에 중·일 사이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한국 산업의 경쟁력 강화 전략을 속시원히 보여주지 못하였다. 미국 월가 금융자본의 세계화 전략과 국내 노동운동의 계급전략 사이에서 새우등이 되어가고 있는 한국 경제의 조절전략을 보여주지 못하였고, 워싱턴의 네오콘(신보수파)의 세계 전략과 평양의 올드콘(구 보수파)의 핵 전략 사이에 낀 한국 경제의 지정학적 위기를 극복할 독자 전략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3중의 압박을 꿰뚫는 종합적인 비전과 전략, 그리고 그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한국 경제는 물론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를 막기 어려울 것이다. 보수 야당이 노무현 정부의 경제 파탄 책임을 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 성장 시대의 정책 패러다임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일 것이다.
경제가 무너져도 민주주의는 성장한다고 생각하면 그것 역시 바보짓이다. 나는 한국경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들라면 지금부터 3, 4년을 들고 싶다. 우리가 선진 경제를 이룩하느냐 선진국의 문턱에서 주저앉고 마느냐의 역사적 갈림이 이 시기에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수든 진보든 새로운 반성이 있어야 한다. 정치권은 선거 때 눈물을 흘리며 뼈를 깎는 반성을 한다고 했지만 아직도 남은 뼈가 있다면 이제는 한국 경제의 냉혹한 현실 앞에서 진짜 뼈를 깎는 반성을 해야 하다. '선거 올인'에서 '경제 올인'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경제의 새 그림을 그리고 새 전략을 합의하여 좌우 날개 역할을 분담해 주어야 한다.
촛불 데모를 하는 측에서도 '나라 걱정 하지마, 제발 걱정하지 말아 줘' 하는 노래를 할 것이 아니라 '나라 경제 걱정해, 제발 경제의 새 그림을 그리고 대타협을 해 줘'하고 노래해야 하지 않을까. 동북아의 험악한 골짜기에서 우리는 '날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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