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포성이 울리고 집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집 뒤로 수백 개의 해골들이 솟아올랐다. 전쟁의 야만성을 이보다 더 극적으로 깨우쳐 줄 수 있을까. 전쟁의 비극성을 말 없이 규탄하는 묘지로 연극은 모든 것을 말했다. 연출가 손진책(57)의 거장다운 마무리였다.
'죽음과 소녀'를 쓴 세계적 극작가 아리엘 도르프만(62)의 신작 '선의 저쪽'(The Other Side)의 12일 세계 초연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음악이나 조명의 도움없이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게 작가의 의도를 극화한 연출의 힘이 두드러졌다. 일본 도쿄 신국립극장 소극장을 메운 관객의 박수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작품은 국경 위에 자리잡은 한 노부부의 집을 통해 전쟁 중인 두 나라의 비극적 상황을 우화적으로 보여준다. 엘리아스 카네티의 단편소설 '국경 위의 집'처럼 만약 집 한가운데를 국경이 가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희극적인 상황을 제시하며 전쟁의 비극성을 극대화한다. 수십 년을 전쟁 중인 콘스탄자와 토미스, 두 나라를 가르는 국경 위의 집에서 노부부가 살고 있다. 부부는 전쟁 통에 아들까지 잃었다. 남편 아톰(시나가와 토오루·68)은 희망을 잃은 지 오래지만, 아내 러바나(기시다 교코·73)는 아들이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전쟁의 막바지, 한 군인(치바테츠야·41)이 집을 부수고 들어와 집안에 국경선을 그으면서, 화장실로 갈 때도 비자가 필요한 우스꽝스런 상황이 발생한다.
겨우 세 명의 배우로 장과 막 구분도 없이 두 시간을 진행하지만, 극에는 고압선 같은 긴장이 흐른다. 러바나는 군인을 오래 전 집을 나간 아들 요셉으로 믿는다. 군인은 이를 부정한다. 작가는 이 끔찍한 아이러니 속에서 모성애와 '인류의 부엌'을 보여주며 희망을 타진한다. 러바나는 정성스레 수프를 끓이고 빵을 내와 군인을 먹이면서 자식을 대하듯, 이 세상의 모든 아들을 대하는 모성애를 보여준다. 일본이 자랑하는 관록의 배우 기시다 교코는 절절한 모성애를 인류의 희망으로 끌어올리는 감동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일본 평론가 오자와 요시오는 "도르프만이 그린 세계가 전쟁으로 신음하는 세계 현실과 잘 맞아 생생한 감동을 받았다"며 "분단국가인 한국의 연출가를 통해 주제가 더 잘 살아났다"고 평했다.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도 "손진책씨가 공포스럽고 부조리한 극의 분위기를 훌륭하게 극화했다"며 '선의 저쪽'이 칠레의 극작가, 한국의 연출가, 일본의 배우가 함께 만든 점을 강조했다. "우리 예술가들은 경계를 부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외교관이자 정치가이다."
'선의 저쪽'은 9월 영국에서 공연하며, 내년에 한국에서도 공연될 예정이다.
/도쿄=이종도기자 ecri@hk.co.kr
■ 연출 손진책씨
"나의 심장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공연 뒤풀이에서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은 손진책을 이렇게 소개했다.
손진책이 아리엘 도르프만의 작품을 한 것은 두 번째. 도르프만은 "내 작품 '죽음과 소녀' 한국 연출(1994년)을 보고 그의 재능을 알았다"고 했고, 손진책은 "내가 연출한 작품 가운데 도르프만의 '죽음과 소녀'가 가장 좋다"고 화답했다.
손진책은 "초대해준 일본 연극계의 기대에 보답해야 한다는 점이 부담되었다. 주제가 명쾌해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면 할수록 어려웠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는 "세계가 전운에 휩싸여 있고 일본인이 이라크에 인질로 잡힌 사건도 있어 시의적절한 공연이라 생각한다"며 "가장 철학적인 주제를 현실화시켜 보여줄 수 있는 게 바로 연극"이라고 작품의 의의를 설명했다.
"비극의 순환이자, 절망의 극복이라는 양면성을 드러내려 했다"는 손씨는 어떻게 그걸 연기로 보여주냐는 일본 배우들의 질문에 "웃음과 눈물을 다 보여줘라. 인간사는 단순하지 않다"고 답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음악도 없고 장식도 없고 조명도 단순하게 간 것은 극의 본질만 드러내게 하자는 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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