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적십자사가 수행한 가장 중요한 사업 중 하나가 남북적십자회담이다. 1971년 8월12일 당시 총재 최두선(崔斗善) 박사는 남북한에 갈라져있는 가족을 찾아주고 이산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사업을 하자는 역사적인 대북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남북적십자 회담 제의는 세계에 널리 보도된 빅뉴스요, 이산 가족들은 물론 남북한 전동포를 놀라게 한 반가운 소식이었다.이 제의는 전날까지 우리 한적 직원들에게도 극비에 부쳐진 보안 사항이었다. 사실은 이 회담 준비를 추진해온 기구가 남북회담사무국이라고 따로 있었던 것이다. 이런 중대사항을 사전에 유출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러한 보안조치를 취한 것이다.
분단의 비극은 전 민족이 다 겪는 일이지만 그 중에도 1,000만 명에 달한다는 이산가족의 고통이야말로 헤아릴 수 없이 큰 비극임에 틀림없다. 그들의 생사와 안부를 확인하고, 상봉 면회와 재결합까지 추진하는 남북적십자회담이야말로 남북으로 갈라진 민족의 불행과 비극을 해소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뜻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부모와 동기 혈육들을 북쪽에 남겨두고 온 나 자신에게도 크게 기대되는 기쁜 소식이었다.
이 제의는 문서로 작성된 뒤 판문점을 통해 북한적십자사 당국에 전달됐고, 북한측은 며칠 만에 수락의사를 전달해왔다. 9월20일부터 25차례에 걸쳐 예비회담이 진행돼 다음해인 72년 7월4일 남북조절위원회(위원장 이후락·李厚洛)에서 적십자 본회담을 열기로 합의, 8월29일 평양에서 본회담이 개최됐다.
적십자국제위원회(ICRC)가 제정한 제네바조약에 따라 전시난민 또는 이산가족의 재결합을 위한 지원활동은 국제적십자운동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그런데 사실은 이미 56년에 우리 정부에서 ICRC를 통해 '납치 인사'의 생사안부탐지를 북한에 제안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북한은 납치한 사람이 없다고 주장, ICRC가 납치인사 대신 '이산가족'(disposed family)으로 용어를 바꾸자고 해 7,000여 명의 신고를 받아 북에 보낸 일이 있다. 그러나 57년 340명의 생사안부에 대한 회답을 받은 뒤 진행이 끊어졌다.
본회담 대표단 단장에는 50년대 한적 출신이며 튀니지 대사로 있던 이범석(李範錫)씨가 임명됐다. 나더러 실무위원 의료진 보도반 등 대표단을 수행할 일행들에게 적십자 강의를 하라고 해서 적십자운동의 취지와 사업, 법규 등에 관해 2∼4시간씩 여러 차례 강의를 했다. 좀 우스운 것은 그 때 제일 큰 음식점(요정)이었던 '오진암' 접대부들에게까지 강의를 하라고 해 어느 더운 날 50여명의 아름다운 아가씨들에게도 2시간 가량 강의를 한 일이 있다.
본회담 이틀 전에 대표 7명의 명단이 발표 됐는데 그 중에 나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청소년 부장이던 나는 뜻밖이었다. 29일 아침 평양으로 떠나게 됐는데 그날 새벽 1시께 기자 10여명이 인터뷰를 하겠다고 집으로 들이닥쳤다. 50년대 중반부터 남산동 한적 사택에서 살았던 나는 남북적십자회담을 위한 사옥을 짓기 위해 사택을 철거하는 바람에 창동의 산 122의 12에 있던 20평짜리 주택을 구해 이사한 직후였다. 기자들이 "무슨 대표가 전화도 없고 자동차도 못 들어 오는 이런 산 속에 살아 기자들을 고생시키느냐"고 불평을 터뜨리는 바람에 가난 탓이니 용서하라고 하며 웃은 기억이 난다. 남북적십자회담이 워낙 큰 뉴스여서 대표들의 프로필까지 신문에 실렸고, 전 언론이 관심을 갖고 보도했다.
29일 아침 적십자 깃발을 날리며 요란하게 떠나는데 서대문에서 파주를 거쳐 임진각까지 통일로 좌우에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나와 환송을 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달리는 차 속에서 '전쟁이 끝난 지 20여년 밖에 지나지 않았고, 남북이 정반대의 양극체제요, 서로 원한이 그대로 있는데 이산가족 문제가 쉽게 해결될까. 우리가 너무 흥분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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