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첫 출발은 아름답게 기억된다. 설사 그것이 힘들기만 하고 모든 것이 손에 익은 지금 돌이켜 보면 별로 잘한 것이 없는 시간이었다 할지라도. 만일 무언가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으며 누군가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기 마련이다.
한국 배구사에서 최고의 거포로 평가 받던 강만수(49·전 현대자동차 감독)씨도 그런 시절과 사람이 있다. 부산 성지공고 3학년이던 1972년 뮌헨 올림픽 대표팀에 뽑혀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았던 때 만난 이규소(64·전 고려증권 단장) 코치다. 고등학생으로 국가 대표가 된 것은 한국 남자 배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위계 질서가 엄한 대표팀에서 혼자만 고등학생이었으니 1년 위 선배부터 모두가 어렵기만 했다. 선배들의 빨래도 막내인 강만수의 몫이었다. 주전으로 뛴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입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독일까지 가서도 시합에는 못 나가고, 하는 일이라고는 빨래가 고작인가 싶기도 했다.
참다 못해 어느날 선수촌에서 빨래를 벅벅 문지르면서 큰 소리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2층에서 이 코치가 강만수를 내려다 보면 웃고 있었다. 강만수는 "지금도 뮌헨 올림픽 생각하면 그 장면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고 한다.
이 코치의 눈에는 막내인 강만수가 예쁘게 보였음이 틀림없다. '초고교급 선수'인 강만수가 앞으로 국가대표팀을 이끌어갈 재목임도 알아 보았다. 9인제 배구 선수 출신으로 꼼꼼하기로 소문난 이 코치는 강만수의 동작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지도했다. 잘못하면 엄한 꾸지람을 듣기도 했지만 늘 무언가를 열심히 가르쳐 주었다. 막내라고 단체기합에서 제외시켜주기도 했고, 아주 잠깐이지만 교체 선수로 올림픽 코트에 세워주기도 했다. 강만수도 처음에는 겁내 하던 이 코치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1년에 몇㎝씩 자라는 키처럼 어느 틈엔가 자신도 모르게 배구 실력도 한단계 올라갔다.
이 코치의 예상대로였다. 4년 뒤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멕시코 유니버시아드였다. 이 코치는 감독, 한양대 4학년이 된 강만수는 주전은 물론 주장까지 맡았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세계규모대회로는 첫 금메달이었다. 감독과 주장으로 우승을 일궈 내면서 강만수는 이 감독에게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배구 기술에 관한 한, 그 때 배운 것을 지도자 생활을 할 때까지 많이 써먹었다"는 것이 강만수의 얘기다. 평소에는 털털해도 운동할 때는 꼼꼼하다는 강만수의 스타일도 이 코치의 영향이 크다. 말보다 실천을 중하게 여겼던 두 사람은 경기를 떠나 인간적인 믿음도 깊어졌다.
강만수는 80년 중동 무대로 진출했고 82년 창단한 현대자동차써비스에서 주전생활을 하다 85년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7년 뒤에야 주니어 대표팀 감독으로 국내에 복귀했다. 그 사이 이 코치는 82, 83년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현대자동차와 같은 해 창단한 고려증권 감독과 단장 생활을 했다. 더 이상 서로 한 팀에서 뛸 기회는 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요즘 자주 만난다. 배구장보다는 골프 연습장에서다. 이 코치는 고려증권 단장을 끝으로, 강만수는 2001년 말 현대자동차 감독을 사임하면서 배구판을 떠난 상태. 두 사람 다 "기웃거리는 것을 싫어하는 성미라" 혹 후배들에게 부담이라도 줄까 경기장에 자주 나타나지 않는 편이다. 만나서도 배구 얘기보다 사는 얘기, 골프 얘기를 더 많이 한다. 배구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 뜨겁다는 것을 서로 알기에 굳이 배구를 말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언제가 어떤 형태로든 한국 배구에 도움이 된다면 마다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두 사람의 공통된 생각일 것이다.
/김지영기자 koshaq@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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