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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29> 보신 &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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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29> 보신 & 준

입력
2004.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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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 회장 저고리옷끝동 자주고름,

긴 치맛자락을

살며시 치켜들고

치마 밑으로 하얀

외씨 버선이 고와라.'

한복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색색의 천에 감춰진 여인의 고운 자태가 눈 앞에 아른거리는 신석초 시인의 '고풍'이다.

본디 의복은 한국인의 일상에서 사람의 됨됨이를 말해주는 가장 중요한 매개였다. 설사 굶더라도 옷만큼은 법도에 맞게 갖춰 입어야 했다. 옷을 지을 때에는 바늘 한 땀이라도 소홀히 뜰 수 없었다. 하물며 비단을 대하는 마음은 더할 나위가 없었다. 비단이 금값과 맞먹었던 예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금도 비단옷은 여전히 호사의 상징이다. 여인들에게 꿈을 팔았던 종로구 관철동 주단골목은 이제 옛말이 됐다. 90년대까지 20개가 넘던 주단점포들은 IMF환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 둘씩 문을 닫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주단골목의 터주대감이나 다름 없던 '보신주단'도 지난해 3월 경복궁 맞은 편으로 옮겨왔다. 3대째 대물림이 이뤄지면서 '보신 & 준'으로 상호에도 변화가 주어졌다. 전통의 계승과 변화의 추구를 동시에 알리자는 뜻에서 상호에 창업자의 손자이자 현재의 대표인 이상준(李尙俊·36)씨의 이름 한 자를 추가했다. 56년 동안 보신상회→보신포목→보신주단→보신 & 준으로 상호가 바뀌어왔다.

"우리 스스로 왜 한복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외면하는지 안타깝습니다. 예컨대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같은 국제회의 기간에 각국 원수들이 꼭 한 번은 개최국의 전통의상을 입지 않습니까. 고이즈미 일본총리는 신사참배 때마다 전통의상 차림으로 하더군요. 정치 지도자들만이라도 국립묘지 참배 때 한복을 입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해보았습니다." 보신의 젊은 주인은 우리 옷을 세계에 알리는 '한복전도사'를 꿈꾸고 있다.

보신은 그의 할아버지인 고 이병직(李炳稷·96년 타계)옹이 48년 창업했다.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이옹은 10대 후반 서울에 정착하면서 비단장사 일을 시작했다. 서대문 부근 형의 점포(동신)에서 3년 정도 일을 익힌 뒤 보신각 주변으로 독립해나왔다. 이옹은 일찍 세상을 떠난 형을 생각하며 주단가게를 가업으로 정했다. 한때 '보신도안'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옹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보신도안'은 주단업계의 유행을 선도했다. 진주의 섬유업체도 이옹을 누구보다 신뢰했다. 이옹은 생전에 장남 이재원(李在元·66)·김현숙(金賢淑·60)씨 부부에게 점포를 물려주었다.

"가위질을 할 때도 자투리를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잘라야 한다. 신용이 으뜸이다. 한번 팔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재원씨 부부는 이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상준씨는 변화와 재도약을 설계하고 있다. 어머니가 그의 곁을 지키며 돕는다. 그는 보신의 재도약이 무엇보다 자신의 변화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자기 변화의 방법으로 그는 성균관대 생활과학대학원에서 의상공부를 시작했다. 아울러 궁중복식연구원에도 등록하고 배움의 폭을 넓혀가면서 차츰 우리 전통의상에 매료됐다.

24세 때 보신의 장래 주인으로 결정된 그 역시 밑바닥부터 일을 배웠다. 문을 열고 닫는 일부터 청소에 이르기까지 허드렛일은 종업원대신 그의 차지였다. 그렇게 3년이 흐르자 드디어 가위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예나 지금이나 비단은 귀물이니 주인이 아니면 감히 가위를 잡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게 업계의 전통이다.

주단(綢緞)은 비단 가운데서도 섬세함과 화려함이 으뜸이다. 종류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다. 대개 양단 유동은 봄·가을 이나 겨울, 숙고사 진주사는 늦은 봄과 초가을, 항라는 초여름, 갑사 생고사 노방은 여름용 옷감으로 즐겨 찾는다. 항라와 노방은 안팎을 겹쳐 옷을 짓는데 안감과 곁감의 올올이 겹치면서 자연스럽게 아롱무늬가 빚어진다.

주단으로 옷을 지을 경우 남자는 바지 저고리 조끼 마고자 두루마기 일습에 130만∼150만원, 여자는 치마 저고리 속치마 속바지 버선 일습에 70만∼80만원 정도 들어간다. 여자도 두루마기를 추가하면 남자와 비슷한 수준이 된다. 공임이 포함된 평균적인 가격이다. 보신을 비롯한 대형 주단점포는 자체 바느질시설을 갖추고 옷을 지어준다. 남덕희(75)할머니는 40여년 동안 보신을 지킨 침선장이다. 전성기에는 바느질을 담당하는 종업원만 11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5명으로 줄었다.

한복도 유행을 탄다. 그러나 보신은 가능한 한 전통을 고집한다. 다만 저고리나 깃 등 일부에 디자인의 변화를 준다. 색상도 대담해지고 화려해진다. 남치마에 옥색저고리, 홍치마에 노랑(또는 연두)저고리, 자주치마에 분홍저고리가 기본이지만 요즘은 이런 원칙보다 개성을 추구하는 고객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상준씨는 음양오행원리에 따른 색의 배합을 가능한 한 지키려고 노력한다. 보신은 그 전통에 걸맞게 명사들의 발걸음이 잦았다. 우리나라의 첫 퍼스트레이디 고 프란체스카여사도 단골이었다. 고 육영수여사는 혼자 가게에 들러 주문하곤 했다. 70년대 중동특수 때에는 건설회사들의 주문이 많았다. 특히 현대건설은 추석이 되면 해외파견 근로자의 부인에게 비단옷감을 선물로 돌렸다.

주단은 곡선미로 상징되는 한복의 선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옷감일 것이다. 단순한 옷감이 무궁무진한 변화를 연출하는 것이다. 주단이 사랑을 받는 이유다.

이기창 편집위원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色속에 자리잡은 음양오행 원리

한국을 비롯한 동양문화권의 전통 생활윤리인 음양오행의 원리는 의상에도 깊숙이 스며 있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는 녹색 옷을 입혀 무병장수를 기원했고 장년층은 갈포와 마포의 빛깔인 황토색 옷감으로 옷을 지어 입었다. 또 노인에게는 담황색의 옷을 입게 해 평안과 안정을 빌었다('우리문화와 음양오행'·권오호).

옷의 색은 신분의 귀천을 표시하는 의미와 더불어 미를 표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고리 중에는 미적 감각을 한껏 표출하기 위해 두 가지 이상의 색을 가미한 회장(回裝)저고리가 있다.

그림을 그리거나 무늬를 수 놓는 것이 아니라 길(옷의 본체)과는 달리 원색의 천을 부속품으로 어울리게 배합하여 옷을 짓는 것이다. 삼회장저고리는 가장 격식이 높고 화려한데 깃, 끝동, 겨드랑이에 길과는 다른 색의 감을 댄 것이다. 회장의 색은 역시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자주색 옷감을 주로 사용한다. 반면에 길은 자주색과 상생의 관계를 이루는 녹색계통의 옷감이 쓰여진다. 회장저고리는 본디 사대부 여인들만 입었지만 일반 백성도 혼례 시 신부예복으로 착용했다.

치마는 통치마와 폭치마로 구분되는데 폭치마는 2폭에서 12폭까지 있다. 치마의 주름은 24개로 24절기를 상징한다. 개화기 이후 짧은 통치마가 등장했다.

옷을 짓는 바느질의 예절도 엄격했다. 우선 바느질에 앞서 앉은 자리를 정갈하게 쓸고 손도 깨끗하게 닦았다. 그런 다음 바늘 실 골무 가위 인두 화롯불 옷감 등 바느질에 필요한 도구와 재료를 미리 준비해 정돈했다. 바느질을 하는 동안 옷에 때가 묻거나 일하는 중간에 재료가 떨어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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