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오월회'모임에서 5·16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적이 있지만 여기서 내가 경험한 바를 이야기하겠다. 이미 그 역사가 다 밝혀진 대로 5·16 사태는 4·19이후 미숙한 민주화의 역기능으로 나타난 혼란을 참지 못한 군인세력에 의한 쿠데타였다.나는 5·16이 발생하던 날 새벽에 이상한 인연으로 5·16 거사를 알게 됐다. 새벽 4시쯤이었다. 남산동 적십자사 사택에서 자고 있는데 후암동 넘어 한강 쪽에서 총소리가 많이 들려 왔다. 무슨 일인가 놀라서 사택 위에 있던 KBS 방송국으로 뛰어올라갔더니 헌병이 집총을 하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새벽이라 거리에는 나 혼자였다. 방송국 안에서 육군 중령 한 사람이 나오더니 " 여기 전화를 걸데 없소"하고 말을 건네와 한적 사무실로 인도하여 전화를 쓰게 했다.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데"대충 진압이 됐습니다. 육군본부에 썩은 놈들이 좀 있는데 조금 있으면 다 잘 될 겁니다."라고 했다. 무슨 대단한 사건이 발생했구나 생각되어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나라 운영을 잘 못하고 군에도 썩은 놈들이 있어 혁명을 했습니다"라고 했다. 후에 보니 그는 5·16 주체세력의 한 명인 박원빈(朴圓彬)중령이었다. 그와는 나중에 5·16 장학회 심사위원으로 자리를 같이 했을 때 그때 이야기를 하며 회상한적이 있다.
며칠 뒤부터 쿠데타의 주역인 박정희(朴正熙) 소장에 대해 남로당 당적을 가진 적이 있다는 등 여러 풍문이 돌았다. 그러나 후에 증명되다시피 그는 사상적으로 완전히 전향을 했고, 군에서 신망이 있던 깨끗한 장군이요 국가지상주의자였던 것 같다. 박 장군이 중심이 돼 우남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차려놓고 2년 동안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하는데 산천(山川)이 떨었다.
박 장군은 적십자사를 잘 밀어주었다. 나는 적십자 활동만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5·16이 난 일년쯤 후에 김모, 황모, 윤모, 서모 등의 청년들이 날 찾아왔다. 그들은 "5·16혁명을 발전시키기 위해 조직운동을 하려고 각 기관이나 큰 단체에서 한 사람씩 고르는데 적십자에는 서 선생이다"라고 했다. 뒤에 알게 되지만 공화당 사전조직의 일환이었다. 나는 "정치에는 생각도 없고, 소질이 안 맞는다"고 거절했다. 나를 좋게 말하니 듣기가 괜찮지만 그 정체도 알 수 없고 뭘 하려는지 불안감이 생겼다.
하루는 그들이 다시 찾아와 "좋은 강의를 들으러 가자"며 지프차에 태웠다. 가보니 마포 당인리 발전소 부근 언덕에 있던, 이승만(李承晩) 박사의 별장이라고 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여기서 강의를 들으시오"하고 어느 방으로 나를 밀어넣었다. 서너 평 정도로 좁게 막은 다다미 방이었다. 빈 깡통을 들여 놓고, 소변도 안에서 보라고 했다. 그냥 앉아 있는데 스피커로 강의가 나왔다. 왜 혁명이 일어났으며, 앞으로 무얼 할 것이며, 그 조직이 얼마나 정밀하며, 과거 정권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등의 내용이었다. 옆 방에도 사람이 있어 말소리가 들려왔으나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오전 10시쯤 갔는데 도시락 먹고 오후 3시쯤 나왔다. 마치 간첩들이 받는다는 밀봉교육 같아 겁이 났다. 또 하루는 남대문 시장 건너편, 옛날 서울시경 뒷골목 2층 집으로 데려갔다. 가보니 열 댓 명이 앉아 있었고, 아는 사람도 몇 명 있었다. 외유를 떠났던 김종필(金鍾泌)씨가 돌아와 처음으로 소감을 얘기한다는 것이었다. 신문에서만 본 김씨를 그 때 처음으로 대면했다. 쿠데타 한 이야기, 외유 갔다 온 이야기 등을 하면서 잘 협조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있으니 그 청년들이 와서 입당원서를 쓰라고 했다. 나는 "적십자 일을 평생 할 사람"이라며 못쓰겠다고 했다. 내가 끝까지 거절하자 그들은 다른 인물을 추천해달라고 해 나는 다른 사람을 천거하고 그들에게서 풀려나게 되었다. 그로부터 두 달쯤 뒤에 공화당이 창당됐다. 나중에 보니 아는 사람 여러 명이 참여했다. 이것이 나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정치의 유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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