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려운 시대를 지나왔다"고 신경림 시인은 말했다. 그는 '나'가 아니라 '우리'라고 했다. 그의 시도 '나'가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 쓰여져 왔을 것이다.'신경림 시 전집'(전2권·창비 발행)이 출간됐다. 시인은 올해 우리 나이로 고희를 맞았다. 시력(詩歷) 48년째, 그는 그간 '농무'(1975)에서 '뿔'(2002)까지 9권의 시집을 냈다. 각각 500페이지에 이르는 전집 두 권에는 9권의 시집에 실렸던 458편의 시 전부가 묶였고 평론가 염무웅 이병훈씨의 해설, 연보와 연구자료 목록 등이 수록됐다. "잘 하는 건 시밖에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다른 능력은 없었다"는 게 5일 만난 시인의 겸허한 첫마디다.
그러나 시를 쓴다는 것은, 노력으로 잘 할 수 있는 것 위에 있는 매우 특별한 능력이다. 신경림 시인은 스물 한 살에 등단했고 1년 뒤 낙향해선 시를 쓰지 않았다. "한국전쟁 직후였다. 그때 많이 썼던 서정시와 내가 본 현실이 너무 멀리 있는 게 아닌가 회의했다. 창작의 신명이 나지 않았다." 그는 고향 충주에서 농사를 짓고 광산과 공사장에서 일하고 방물장수와 아편 거간꾼들을 따라다녔다. 그렇게 떠돌았던 그가 서울로 올라와 한국일보에 '겨울밤'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재개한 것은 10년이 지난 서른 살 때였다.
전집의 맨 앞쪽에 실린 첫 시집 '농무(農舞)'는 그의 시집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지고 가장 많이, 오래 사랑받아 온 것이다. 시인도 특히 애착이 가는 작품집으로 꼽았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농무') 이 시에 담긴 정신은 그의 시작 활동 전체를 통해 변함없이 흘러왔다. 민요의 가락에 심취한 1970년대 '새재'와 '달 넘세'에서도, 장시집 '남한강'에서도, 언어의 예술성을 지향한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과 '뿔'에서도 그가 '농무'에서 보여준, 몸으로 부대끼는 진짜 삶에 시에 뿌리가 있다는 생각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삶이 시와 다르지 않다. 그는 떠돌아다니면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살아가는 얘기에서 시를 길어올렸다. 굴곡의 현대사를 겪으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간사, 민청련 지도위원, 민예총 의장, 작가회의 이사장 등을 맡아 일해왔다. 그는 "현장 한가운데에 서 있다고 느꼈을 때,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나아갔을 때 쓰여진 작품에 마음이 오래 간다"고 말한다.
"못 읽었던 책도 읽고, 못 들었던 음악도 듣고… 그리고 이제 시집 한 권 정도 더 내면 될 듯 싶다"고 시인은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늘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마음을 앓는다고도 했다. "내 시는 머물던 곳에서 떠나고 싶은 심정과, 떠돌다 보면 돌아오고 싶은 심정 사이에서 쓰여지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그는 말했다. 어느 곳이든 그의 시는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이 어우러진 세상에서 나온다. "시적인 영감은 현실과 생활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시는 우리 시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견고한 시론이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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