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잠만 자다 퇴근한다니까요." 경기 시흥시 시화공단내 골판지포장재 제조업체 A사의 용역 트럭기사 김위곤(40)씨는 6일 기자를 만나자마자 생산량이 급감하는 바람에 일거리가 없다는 하소연부터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공장 앞 주차장에는 텅 빈 대형 트럭 10여대가 멈춰서 있었고, 기사 대기실에는 김씨의 동료들이 하릴없이 담배만 피워 물고 있었다. 시화공단에서 8년째 일한다는 김씨는 "외환위기 때도 하루에 한 두건씩은 꼭 일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루에 한건 하기도 힘들다"고 답답해 했다.
다른 중소기업들이 모두 그렇듯 골판지 업계는 요즘 경기 침체와 원자재난의 이중고에 짓눌려 있다. 대기업들에 전자 가전제품 포장재를 납품하는 A사는 업계에서도 비교적 대형업체에 속하는 중견기업. 평상시에는 주야 교대근무로 하루 종일 기계를 돌려야 간신히 납품기일을 맞출 수 있었으나 최근에는 하루에 몇 시간씩 기계가 멈춰서 있는 게 다반사다.
이 회사 임원 B씨는 "지금이 1년 중 최성수기인데 생산량이 지난해의 30% 수준 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며 "이번달에 직원 임금을 재조정해야 하는데 걱정"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 만난 직원들도 표정이 밝지 않았다. 총무부서에서 일한다는 한 직원은 "거래처에서 들어오는 어음 중 부도어음 비율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며 "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해 변호사를 섭외하는 게 중요 업무가 됐다"고 말했다.
골판지 업계의 어려움도 원자재난 때문이다. 골판지의 원료가 되는 골심지 가격이 지난 연말 대비 52%나 인상됐으며 저급지도 37%나 인상됐다. 그나마 중국이 원자재를 싹쓸이하면서 국내 업계는 그야말로 종이 구경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수출물량 중 98%가 중국과 홍콩으로 수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설상가상으로 경기 침체까지 겹치면서 주문량도 뚝 떨어졌다.
대기업의 횡포도 한몫하고 있다. 중소기업들은 폭등한 가격으로 원자재를 구매하지만 완제품은 예전 가격대로 납품하고 있는 것. 일부 대기업의 경우 오히려 납품을 무기로 가격 인하 요구는 물론 팔리지 않는 대기업 제품 강매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B씨는 "인상은 고사하고 오히려 가격을 10% 이상 낮춰달라는 요구도 은근히 들어온다"며 "한 업체는 대기업으로부터 '우리 물건을 사주지 않으면 납품을 받지 않겠다'는 협박성 강매 요구도 받았다고 들었다"고 귀띔했다.
한국골판지포장공업협동조합 김진무 전무는 "1,2월에 흑자를 봤다는 업체는 한 군데도 보지 못했다"며 "연 400억원의 매출을 하는 모 회사의 경우 최근 두달 사이에 8억원 적자를 봤다고 한탄하더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나, 정작 위기는 지금부터라는 게 업계의 걱정이다. 김 전무는 "인상된 원가가 상품가에 반영되지 않는 현상이 이번달과 다음달까지 지속되면 업체들의 경영압박이 상당할 것"이라며 "다음달 캐나다에서 열리는 국제 펄프업자들의 모임에서 펄프 가격이 대폭 인상될 수도 있어 '4,5월 대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박진석기자 jse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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