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이 이기느냐, 감독이 이기느냐.잘 만들어진 범죄 미스터리 영화는 관객과 감독의 한판 두뇌싸움이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세븐'이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는 감독의 완승이었다. '관객에게 조금씩 보여줘라'라는 시나리오 철칙에 충실한 이 영화를 보고 관객은 대부분 "내가 졌다" 고 인정했다.
그러면 한국영화 '범죄의 재구성'(감독 최동훈)은? " 처음 90분은 감독이 이겼고, 나머지 30분은 관객이 이겼다."
영화의 기본 얼개는 사기꾼 5명이 한국은행 금고에 보관된 50억원을 턴다는 것. 사기전과로 출소한 최창혁(박신양)은 완벽한 시나리오를 갖고 사기꾼들의 대부 김선생(백윤식)을 찾아간다.
"작품이 하나 있는데 출연배우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해서 입담꾼 얼매(이문식), 여자킬러 제비(박원상), 위조기술자 휘발류(김상호)가 가세한다. 범죄의 달인 11명이 카지노를 터는 할리우드 영화 '오션스 일레븐'과 비슷한 설정이다.
그러나 '범죄의 재구성'은 이 플롯을 한번 더 꼬았다. 애써 훔쳐낸 50억원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주모자 최창혁마저 죽어버린 것이다. 김 선생이야 그 '역(逆)사기'에 노발대발하므로 진짜 범인은 아니라고 해도 나머지 4명이 의심스럽다. 감독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극중 형사반장(천호진)은 물론 관객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누가 범인이게?"
여기까지 90분은 감독의 승리였다. 경찰에 체포된 얼매의 진술을 통해 현재와 과거를 현란하게 오가는 화면과, 최창혁의 형 창호(박신양 1인2역)와 김 선생의 동거녀 서인경(염정아)의 등장 등 감독이 맘먹고 범죄를 재구성했으니, 관객의 패배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나머지 30분, 김 선생이 진짜 범인을 상대로 펼치는 또 하나의 부동산 사기극은 관객의 승리다. 그 사기극에서 누가 이길지 처음부터 알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제법 탄탄한 시나리오와 백윤식 박신양 천호진 등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 때문에 빛난다. 끝까지 이야기의 탄력과 호흡을 유지하는 힘이 느껴진다. 특히 3류 사기꾼들의 '유식한' 대사와 그들만의 은어가 압권이다. "카프카의 부조리 아시죠? 저 제비랑 친하거든요. 그런데 그놈 집은 몰라요." "청진기 대보니까 진단이 딱 나온다. 시츄에이션이 좋아."
의문점 하나. 유능한 형사반장 천호진은 왜 영화가 끝날 때까지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걸까. 물론 범인이 누구인지 알았으면 영화가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겠지만, 이 같은 아이큐 낮은 형사의 존재는 이 영화의 치명적 약점이다. 감독과 관객이 한번씩 이긴 이 영화에서 끝까지 못이긴 것은 결국 그 형사뿐이니 말이다. 15일 개봉. 18세 관람가.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최동훈 감독/"캐릭터 만들려고 사기꾼 숱하게 만나"
"다산 정약용이 녹차를 마시며 느꼈던 안빈낙도의 즐거움보다는, 봉이 김 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아먹기 전날 지었을 미소가 그립다."
최동훈(33) 감독은 이런 정서로 데뷔작인 '범죄의 재구성'을 만들었다. 돈은 훔치되 사람은 죽이지 않는 괴도 루팡에 대한 어렸을 적 흠모의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20개월 동안 17번 고쳤고, 촬영은 지난해 9월23일부터 4개월동안 했다. 그는 서강대 국문과와 영화아카데미(15기), 임상수 감독의 '눈물' 연출부를 거친 신예 감독이다.
―왜 하필 사기극인가.
"대학생 때 서울로 유학 와서 전세보증금 1,800만원을 날린 적이 있다. 집주인이 보증금으로 시 소유지의 판자 집을 사버린 것이다. 변호사도 '고의성이 없기 때문에 사기 혐의로 고소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그래서 포기했다. 돈은 날렸지만 그때 사기꾼을 다룬 시나리오를 써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솔직히 이 세상에 사기와 범죄 아닌 게 어디 있나. 요즘 20, 30대 치고 혼인빙자간음죄에 걸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
―제목이 특이하다.
"시나리오 초고에 붙였던 가제인데, 퍼즐처럼 범죄를 처음부터 다시 짜맞춘다는 의미에서 '재구성'이라는 말을 썼다. 처음 초고를 써보니 신이 300개가 나왔다. 원고를 하나하나 벽에다 붙이고 사건의 흐름을 이리저리 뒤바꿔봤다. 한마디로 시나리오도 여러 번 재구성한 것이다."
―사기꾼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었나.
"처음에는 '캐릭터가 땅에 붙지 않았다'는 비판을 많이 들었다.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취재에 들어갔다. 마약 했던 사람, 포커꾼, 금강제화 상품권 위조범, 그리고 건달까지 두루 만나 귀동냥을 했다. 경마장 사람들도 만났다. '4번 말 찍어. 청진기 대니까 진단 나와'라는 말도 경마장에서 들었다. 그러나 진짜 사기꾼은 만나지 못했다. 사기꾼은 보이지 않는 법이다."
―배우들을 평가한다면.
"우선 백윤식씨는 대사의 억양과 장단까지 연구할 정도로 노력파다. 극중 김 선생의 첫 출연 장면을 찍는 순간, '아, 이 영화는 바로 이렇게 가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박신양 선배는 아주 볼품없는 장면도 훌륭하게 만드는 배우다."
―감독론은.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다. '범죄의 재구성'에서 특별한 메시지는 없다. 굳이 메시지를 찾자면 '사기를 당하지 말자' 정도다. 차기작은 1974년 이종대 문도석의 캘빈소총 강도사건을 다룬 범죄 스릴러다. 이장호 감독의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가 이를 소재로 했으니까 내 작품은 일종의 리메이크가 될 것이다."
/김관명기자
■감히 한국은행을 턴다? 한국은행, 촬영 거부… 예고편선 은행名 빠져
'범죄의 재구성'은 한국은행을 터는 이야기다. 범죄의 대상이 다름아닌 한국은행이라는 점이 이 영화의 최대 매력이다.
그러나 영화 예고편에서는 '한국은행'이라는 말이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왜 그럴까. 사연은 이렇다.
지난해 가을 영화 연출부가 촬영 협조를 구하고자 한국은행을 찾아갔지만 단호하게 거부 당했다. '대한민국 중앙은행으로서, 국가보안 갑급에 해당하는 기관'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다음날에는 연출부를 입구서부터 막았다. 그래서 극중 한국은행은 부산의 옛 법원건물에서, 금고는 경기 광주의 한 금고회사에서 찍었다.
최동훈 감독에 따르면 한국은행은 한때 이 영화에 대해 촬영금지 가처분 신청까지 낼 생각이었지만, 외국사례를 보고 포기했다.
미연방준비은행(FRB)도 영화 '다이하드 3'가 FRB를 터는 장면이 나온다고 해서 영화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려다가 말았기 때문이다.
당시 자문결과는 'FRB는 누구나 접근 가능한 공공장소(퍼블릭 도메인)로 봐야 한다'였다.
한국은행은 대신 '범죄의 재구성' 제작사를 찾아가 이 같은 내부검토 과정을 설명하며 한마디 부탁을 했다. "예고편만이라도 한국은행이라는 말을 빼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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