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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선거와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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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선거와 노인

입력
2004.04.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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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노인정을 돌면서 무릎이 아프도록 절을 하고 있다. "60대 이상은 투표를 안 해도 괜찮다"는 자신의 발언을 사과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노인들의 분노가 풀린 것 같지는 않다.70대 후반으로 보이는 세 여성이 지하철에서 정 의장을 성토하고 있었다. 금요일 아침 10시쯤 매봉역에서 탄 그들은 양재천을 산책하고 오는 듯 산뜻한 운동복 차림이었다.

"기막히지 않아? 이 나라를 누가 만들었는데 감히 그런 소리를 해. 전쟁에 나가 피 흘리고, 허리띠 졸라매며 일해서 이만큼 살게 됐는데 노인들은 선거 날 집에서 쉬라고? 그게 당 대표가 할 소리야?"

"저희들이 얼마나 살았다고 큰 소리야. 이 세상에 나온 지 삼사십년, 사오십년밖에 더 돼? 젊은 사람들끼리 모여 아우성친다고 나라가 잘 될 줄 알아? 우리보고 무대에서 내려가라니 선거가 무슨 노래자랑이야?"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고 거침이 없었다. 맞은 편 경로석의 할아버지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는 소리예요"라고 거들었다. 앞 뒤에 서 있는 승객들은 흥미롭게 귀 기울이고 있었다.

토요일 낮 장충동의 평양면옥엔 늘 그렇듯 노인 손님들이 많았다. 방에 앉은 십 여명의 할아버지들이 같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 말하는 거 보면 무서워요. 저희들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고. 노인들에게 지지를 호소해도 부족할 판에 투표 날 집에서 쉬라니 그런 망발이 어디 있어."

"투표에서까지 노인들을 고려장시키자는 건데 우리가 무슨 죄인인가. 우리가 저희들처럼 돈을 먹었나, 법을 어겼나, 거짓말을 했나. 오늘의 노인 세대가 한평생 뼈빠지게 일해서 대한민국이 잘 살게 됐다는 걸 알아야지."

"투표는 신성한 국민의 의무인데 누구 맘대로 하라 마라 하는 거야. 늙은이들 뒷방에 가두고 젊은이들끼리 설치면 새 나라가 된대?"

노인들이 모이는 곳마다 성토장이 된다. 지난 대선 이후 젊은 돌풍에 충격을 받고 있는 나이 든 세대는 젊은 여당 대표 입에서 "노인들은 투표를 안 해도 괜찮다"는 말까지 나오자 경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태가 과거 '충청도 핫바지론'처럼 발전하여 "노인이여 궐기하라"로 확대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정동영 의장은 지난 달 26일 기자회견에서 "미래는 20, 30대의 무대이므로 오늘의 결정에 이해관계가 걸려있다. 그러나 노년층은 이제 무대에서 퇴장할 분들이기 때문에 그분들이 미래를 결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층의 투표참여를 강조하다가 실수를 했다고 사과했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는 망발이다.

열린우리당에게는 노년층의 투표가 도움이 안 된다는 계산과 함께 내심 노년층을 경시하는 태도가 엿보인다. 각 당마다 지지 계층과 연령층이 다르지만, 이처럼 노골적으로 선별적이고 배타적인 호소를 하는 것은 공당의 자세가 아니다.

이번 총선은 불과 열흘 남았지만, 노년층은 앞으로 선거에서 강력한 압력단체 구실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각종 시민 단체들이 선거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노인들은 "투표를 안 해도 된다"는 수모를 당해서는 안 된다.

노년층은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사회개혁에 헌신할 수 있는 조직을 키워야 한다. 은퇴한 전문인력이 풍부하고,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있으므로 얼마든지 활동범위를 넓힐 수 있다. 예금 이자로 살고 있는 노인들을 위한 노년 특별 이자 지급, 노인주택과 양로원 대책, 영세 노인 문제 등 개발할 과제가 많다.

총 유권자 3,560만명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20대 22.1%, 30대 24.9%, 40대 22.8%, 50대 13.2%, 60대 이상 16.9%다. 50대 이상이 30%나 된다. "노인 문제에 대해 확실한 공약을 내놓는 당에 투표하겠다"고 큰 소리칠 수 있는 숫자다.

이번 선거에서도 노년층은 의미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 굴곡 많은 한국정치사를 지켜 본 경험 많은 유권자로서, 사회의 어른들로서, 진정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는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 노인들은 투표 날 집에서 쉬기만 해서는 안 된다.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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