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보수세력의 이념적 빈곤은 단순히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진보세력의 이념적 빈곤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한국정치에서 보수적 이념으로서 자유주의의 빈곤과 진보적 이념으로서 사회주의의 빈곤은 악순환을 구성하고 있다."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강정인(50·사진) 교수가 국내 정치학 연구의 서구 편향 실태를 조명하고 극복 방안을 제시한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아카넷 발행)를 냈다. 8년에 걸쳐 발표한 논문을 묶은 것이다. 이전의 관련 연구를 폭 넓게 인용한 것은 물론, 일관된 논리 전개와 차분한 논조가 돋보이는 이 책은 1990년 이후 인문학계를 중심으로 전개된 서구 편향의 학문태도를 극복하자는 논의가 사회과학계로 범위를 넓혀가는 추세를 보여준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한국에서 보수주의의 개념을 정의하고,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강 교수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보수주의를 비정상적인 것(일탈)이라거나, 부족한 것(부재)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서구중심적인 시각이라고 비판했다. '근대화가 자율적, 내생적, 선진적이었는가' '타율적, 외생적, 후발적이었는가'는 역사적·정치적 변수에 따라 다른 것이지, 어느 것이 중심이고 어떤 것은 일탈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소 냉전이라는 세계사적 시간에 의해 규정'된 한국의 보수세력은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임무를 국내외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그것을 지키는 임무로 대체하고 나아가 빈번히 전자를 후자, 곧 자유민주주의를 반공과 동일시하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보수주의 이념은 빈곤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이념적 빈곤을 해결하기 위한 당면과제로 강 교수는 '정치적 보수주의와 철학적 보수주의 간의 원초적 모순해결'을 꼽았다. 철학적 보수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정치적 보수주의를 자유민주주의 및 시장경제의 이념과 더욱 탄탄히 연계하거나, 유교 등 전통적인 사상적 자원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진보세력에게 정당한 몫을 돌려주어야 한다. "보수세력은 과거와 같은 독점구조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개혁 지향적인 진보적 인사들과 권력, 언론, 문화적 헤게모니 등 정치적 자원을 공유해야 하는 현실을 수용해야 한다."
이 책의 무게 중심은 물론 정치학계의 서구이론 편향을 극복하자는데 있다. 우리 현실과 동떨어진 존 롤스의 '정의론'이 학계에 풍미했던 예를 들며 서구에서 배워 온 학자를 중심으로 학문적 문제의식이 서구화하는 것은 물론, 서구이론에 한국 현실을 동화시켜 해석하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비서구사회의 현실이나 사실은 주변화하고 적절한 이론화 계기를 상실하기까지 한다고 했다.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조건으로 '다중심적 다문화주의와 문화끼리의 대화' 등을 제시하고, 그 출현을 가능케 할 정치·경제적 조건으로 동아시아의 부상을 꼽았다. 그는 "서구이론의 일방적인 추종은 한국의 절박한 현실과 학자의 역사적 사명을 외면하는 자기 기만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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