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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공동善 지킴이 서영훈 <8>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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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공동善 지킴이 서영훈 <8> 한국전쟁

입력
2004.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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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밀항 실패 후 공주의 신현상(申鉉商) 선생 댁에서 9개월 반 가량 머물며 마곡사 갑사 동학사 등을 유람하고 그 지방 민족청년단 동지들과 친교도 하며 지냈다. 마침 신 선생이 1950년 5·30 선거에 출마했다. 압도적으로 인기가 있었으나 신 선생은 김구(金九) 선생의 직계로 한독당 소속이어서 여당인 한민당과 경찰의 엄청난 방해공작에 시달리다 선거 운동원들이 모두 피신하고 막바지엔 자신도 숨어야 하는 고초를 겪은 끝에 결국 수백 표 차로 낙선하고 말았다.6월23일 밤이었다. 그 날의 꿈은 지금도 생생하다. 한반도 전체가 저 북쪽으로부터 한치의 틈도 없이 불길에 휩싸여 내려오는 것이었다. 불길이 땅을 핥으며 내려오는데 천지간에 검은 연기가 꽉 차 꿈속에서도 '불심판이구나. 우린 다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불길 속에서 붉은 호랑이가 뛰어나와 나를 해치려 하는 것이 아닌가. 엉겁결에 돌을 들고 그 놈과 대치하고 있는데 남쪽 언덕에서 그보다 큰 백호가 나타나자 붉은 호랑이가 북쪽으로 도망쳐 버렸다. 남쪽 언덕의 고목나무에 잎이 돋고 꽃이 피는 것을 보고 깼다. 나는 꿈이 비교적 잘 맞는 편인데 '조짐이 이상한 꿈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5일 저녁에 라디오 방송을 듣고 전쟁이 터진 줄 알았다. 38선 전역에 걸친 남침으로 전면전이라고 했다. 남한은 국군 내부에도 좌익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그 전해에 한반도가 미국의 극동방위선인'애치슨라인'에서 제외돼 미군이 철수한 터라 대단히 불안하게 생각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나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은 북진통일을 호언했는데 우리가 오히려 당하는구나 했다. 20일 동안은 전황 보도를 들으며 공주에서 그대로 지냈으나 점점 더 불안해졌다.

7월15일 인민군이 조치원까지 내려왔다고 해 그 다음날 신 선생을 모시고 청년 10여명이 일행이 되어 피란길에 올랐다. 도중에 신 선생과 부인 옥봉(玉峰) 여사는 지나가는 차를 각각 빌려 타고 먼저 대전으로 향했는데 그것이 마지막으로 신 선생을 본 것이었다. 두 분은 도중에 길이 엇갈려 부인은 남원쪽으로 가고 신 선생은 다시 공주 본가로 돌아갔는데 우리 일행이 걸어서 대전에 도착해 그 사실을 알았다. 나는 자전거로 신 선생을 찾으러 공주쪽으로 되돌아 갔다가 유엔군과 국군 헌병이 "인민군이 가까이 왔다"며 막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대전으로 돌아와 마지막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와 피란살이를 시작했다. 신 선생은 인민군에 붙잡혀 대전에서 우익 인사들이 집단학살 당할 때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후에 들었다. 부인은 해방 전 20대에 일주(一洲) 김규진(金圭鎭)의 수제자로 선전(鮮展)에서 여러 차례 특선에 뽑혔던 여류 화가였다. 그는 부군 신 선생과 사별한 후 스님이 되어 동학사 주지를 지냈으며 지금은 관음사에서 여생을 보내고 계시다.

부산에서 마침 신문광고를 보니 국방부에서 대위급 대우를 해주는 문관을 모집한다고 해 시험을 쳤더니 합격했다. 많은 피란민이 모여 번화한 국제시장의 어느 2층집에 정훈국 보도 분실을 차려 놓고 국방부에서 보내온 전황보도를 백지에 써서 붙이기도 하고, 스피커로 방송하는 일을 한 달 반 가량 했다. 각 전선에서 국군이 적을 격퇴하며 이기고 있다고 방송했는데 사실은 거의 허위 보도였다. 그 후 부산지구 포로심사위원회에서 일하기도 했고, 농민고등훈련원에서 학감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 다음에 장준하(張俊河) 선배를 만나 '사상'잡지를 냈다가 폐간 당한 사실은 앞에서 말했다.

52년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이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 떨어질 것 같으니까 직선제 개헌을 추진했다. 한민당이 등을 돌리니 철기 장군을 불러 부총재를 맡기고 자유당을 만들었다. 자유당은 철기장군과 조선민족청년단 출신의 몇 사람이 참여, '족청 자유당'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족청계는 별로 없었고 서북청년회, 대동청년회, 국민회 등 이 박사 친위세력이 많았다. 동지들이 나도 끌고 들어가려 했으나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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