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두 자매 세월의 향기를 노래하다/공동 콘서트 갖는 양희은·희경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두 자매 세월의 향기를 노래하다/공동 콘서트 갖는 양희은·희경

입력
2004.03.31 00:00
0 0

언제나 봄날탤런트 윤여정이 양희은·희경 자매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너네 같은 자매도 없다. 인물이 받쳐주는 것도 몸매가 받쳐주는 것도 아니고 내세울 거 없는 하나 없는 애들이, 이 물에서, 늙고 그리고 뚱뚱한 주제에 그래도 한 몫 하며 버티는 게 참 신기하다."

"맞는 말이지. 뭐." 양희은(52) 양희경(50) 자매가 5월 1∼16일 서울 한전아트센터에서 함께 콘서트를 연다. "아줌마는 총출동하라!" 제목은 '언제나 봄날'. 이 땅의 아줌마들에게 설레는 봄날을 찾아 주기 위해 자매가 뭉쳤다. "7, 8년 전인가… 같이 콘서트 해 보자는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워∼낙 우리가 소심해서 누가 불을 당겨 주기 전에는 시작을 못해. 얼마 전에 기획사에서 같이 공연을 해 보면 어떻겠느냐 얘기를 꺼내는데 '어쭈' 싶더라니까. 우리 생각을 읽었나?"(양희은)

'네 꿈을 펼쳐라' '일곱 송이 수선화' 등 양희은의 노래에 양희경이 코러스를 해 준 적도 있고 양희은 콘서트에서 자매가 함께 노래 부른 적이 있긴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자매가 함께 꾸미는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공연은 양희은이 노래를 하고 양희경은 중간 중간 자매가 살아온 지난 이야기를 들려 주는 방식으로 꾸며진다. 장르를 정하자면 '드라마 콘서트'. "우리 어렸을 때 참 눈물 나는 일 많았지?"(양희은) "옛날 얘기하다가 무대에서 주책바가지처럼 울면 어떡하지, 언니?"(양희경) "아휴 신파!"(양희은)

"자매의 이야기를 하는 거죠. 같이 노래도 할 거구. 언니는 공연 내내 전후좌우 30㎝도 움직이지 않고 꼿꼿하게 서서 노래만 하잖아. '땐쓰'가 안 되니까. 그래서 내가 백댄서 노릇도 하려구. 히히."(양희경) 장소팔 고춘자 못지않은 입심의 두 자매가 살아 온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가슴 아픈 지난 날도 쉰이 넘은 지금 돌아보면 '하하' 크게 웃을 수 있는 추억이 됐다.

자매들의 이야기 그리고 아버지

자매의 아픈 기억, 그 한가운데 아버지가 있다. 공연에서 자매가 털어 놓을 이야기에도 아버지는 가장 크게 자리한다. 자매 사이가 각별한 것도 남다른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기 때문이다. 아버지 양정길씨는 육사4기 포병장교로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다. 어머니 윤순모씨는 서울예대 성악과를 나와 패션 디자이너로 일한 당시 흔치 않은 세련된 여성이었다. 종로구 가회동집에서 삼청공원을 놀이터 삼아 보낸 유년 시절은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모든 것이 풍족했다. "손님들이 오시면 우리 자매는 윗목에 서서 아버지가 그만 두라고 할 때까지 노래를 불렀어요."(양희은) "그지, 레퍼토리 확보가 관건이었지."(양희경) "아버지와 어머니는 음악을 틀어 놓고 거실에서 춤을 추곤 하셨고 세자매는 턱을 괴고 그걸 바라보곤 했죠. 행복한 시간이었어 참"(양희은)

모든 게 뒤틀리기 시작한 건 양희은이 열한 살 양희경이 아홉 살 되는 해였다. 아버지의 외도로 부모님은 이혼했고 몇 년 지나지 않아 간경화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빚보증을 잘못 서, 가세까지 기울었다. 양희경과 네 살 차이 나는 막내까지 자매는 연극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엄마 너는 아빠… 이런 식으로 역할을 정해 연극을 하고 놀다가 결국은 우는 걸로 끝났죠.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그게 싸이코 드라마잖아요. 그러면서 정서적 안정을 찾았던 것 같아요."

그로부터 6년 뒤 대학에 입학하면서 양희은은 어머니를 도와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경제적 가장이 됐고 생맥주 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아르바이트를 시작, 가수의 길에 들어선 계기가 됐다. 당시 약 4만원의 개런티를 받았으니 큰 돈이었다. "언니는 아버지 원망 안 하우?" "안해…. 아니, 아니지 원망하지. 아무도 해답을 주지 않는 그 험한 세상 풍파 속에 나를 내몰았잖아. 그립지는 않아. 그래도 어쩌겠어 내 반은 아버지로부터 온 거니까 아버지는 항상 나와 같이 살고 있는 것 같아."

우리는 아줌마인 게 좋아

자매가 비뚤어지지 않고 자란 건 모두 유년시절을 행복하게 보낸 덕이라 한다. "인성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다 형성 된다잖아. 그래서 굶어 죽어도 아이는 엄마가 데리고 살아야 해. 누구 손에 맡기면 안 된다고 생각해." 양희경의 지론이다. 대화는 어느 새 아줌마 사는 이야기로 흘러 가고 있었다.

"내가 '아줌마'를 내세운 공연을 많이 했어요. 우리는 지금 한계령을 넘는다, 겨울동창회, 그대가 있음에…. 이번 공연도 아줌마 대상이죠. 아줌마임을 내세우는 게 양희은 이미지와 안 맞는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저항가수 양희은은 환상일 거에요. 난 내가 아줌마인 게 좋아."(양희은) 자매는 가정의 중심이 부엌에 있다고 생각한다. 일주일에 2번씩 청소해 주는 아줌마가 오는 것 말고는 모든 살림은 스스로 "전투적으로" 해 낸다. "강된장에 밥 비벼 먹어도 같이 밥을 먹어야 가족끼리 기가 통하죠."(양희경)

서로를 다독이며 살아 온 50년. 20대 시절 양희경은 "난 언니처럼 살기 싫어. 난 남편이 10원 갖다 주면 그 돈으로 반찬 해 먹으며 그렇게 소박하게 살 거야"라며 대들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 경기도 일산의 한 동네에 살며 서로의 흰 머리를 뽑아 주고, 정발산에 함께 오르며 건강을 챙기고 일과 살림을 동시에 해내느라 언제나 종종걸음 치는 비슷한 중년의 모습으로 변해 있다.

"언니는 어쩔 수 없이 시작한 노래지만 나는 연기를 공부했고 전공을 살려 무대에 선거니까 내가 더 복 받은 인생이지."(양희경) "그래. 원래 내 꿈이 코미디언이었잖아. 내가 원래 엄청 웃기거든. 초등학교 때 내 별명이 여자 구봉서였다니까. 전유성씨가 전에 '데뷔해, 쉰 다섯 되는 해에 데뷔해. 내가 대본 써 줄게' 그랬을 정도인데. 데뷔해 볼까?" 공연문의) 1544―0737

/최지향기자 mist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