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이후 역풍으로 몸살을 앓던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어느 정도 내분을 수습하면서 이제 정국은 탄핵 정국에서 선거 정국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추세를 볼 때 이번 총선은 어쩔 수 없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 문제를 놓고 탄핵 찬성이냐, 탄핵 반대냐라는 탄핵 심판이 유권자들의 투표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대통령 탄핵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이는 불가피한 일이다. 특히 그 결과 특별한 변수가 생겨나지 않는 한 이번 기회에 한국 정치를 좌우해 온 수구세력과 지역주의를 심판할 수 있는 좋은 기회까지 덤으로 생겨나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탄핵 정국이 빛만 있는 것은 아니다. 탄핵 정국이 가져다 준 심각한 부작용, 즉 탄핵 정국의 그림자는 탄핵 정국이 마치 블랙홀처럼 다른 모든 쟁점들을 삼켜 버리고 만 것이다. 예를 들어 부정부패 등 문제가 많은 후보들에 대한 낙선운동이 별 효과가 없게 되어 버렸다. 탄핵 반대의 절대적인 여론, 이에 따른 열린우리당의 놀라운 인기 상승에 의해 낙선 대상자라도 열린우리당 후보는 개인적인 결격사유를 다 용서받고 당선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부작용은 탄핵 문제로 인해 중요한 정책적 의제들이 사라져 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 동안 한국 정치의 경우 보수 일변도의 정당 체제로 인해 정당 간에 이념적 차이가 별로 없는데다가 민주화 이후에는 지역주의가 지배함으로써 정책이 선거의 중요한 변수가 되지 못해 왔다. 특히 국회의원 선거는 당 못지않게 인물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 이 같은 추세가 강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의 경우 지역주의를 대변해 온 3김 시대가 사실상 끝나고 치르는 첫 선거라는 점에서 정책 선거의 가능성을 주목해 왔다. 또 이번부터 국회의원 선거에도 1인 2표제가 도입되어 순수하게 지지 정당에 한 표를 던지게 됨으로써 각 정당에 대한 정책 평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다. 따라서 시민단체들 역시 이번 총선에 있어서 정책 평가에 각별히 공을 들여 왔다.
특히 총선시민연대의 경우 열 개 분야에 대한 각 당의 정책을 평가해 순위를 매겨 발표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탄핵 사태 이후 이런 판에 정책 평가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많은 평가 교수들의 문제 제기로 정책 평가 작업을 축소해야 했다.
물론 탄핵 문제는 중요하다. 그러나 탄핵 문제로 인해 뒤로 미뤄 놓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정책적 의제들이 산적해 있다. 우선 노무현 정부의 평가와 재신임, 나아가 각 당과 후보들의 정체성과 관련된 쟁점들만 하더라도 이라크 파병부터, 북 핵과 햇볕정책의 후퇴 문제, 연이은 노동자 분신 사태를 가져온 노동 정책, 날로 심각해지는 청년 실업과 신(新)빈곤 문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상징되는 교역 정책, 부안 핵폐기장 일방 추진 문제,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 재벌개혁 문제, 교육정보행정시스템(NEIS)과 집시법 개악으로 상징되는 인권 정책 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예를 들어 이라크 2차 파병이 눈앞에 다가온 가운데 이미 파병을 한 스페인에서 대규모 폭탄테러가 발생해 집권당이 패배하고 승리한 새 집권당이 철군을 발표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지만 계획대로 이라크 추가 파병을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논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탄핵 문제는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정책적 의제들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에서 정치권에서부터 시민·사회단체, 언론기관에 이르는 모두가 정책적 의제들을 살려내기 위한 노력을 지금부터라도 기울여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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