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3월30일 전남대 영문과 휴학생 김남주, 같은 대학 법학과 재학생 이 강, 광주 석산종합고 교사 박석무 등 20대 젊은이들이 광주지검에 구속됐다. 이른바 '함성'지 사건의 시작이었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유신 체제가 일당 독재와 장기 집권을 위한 정치적 폭거이므로 이를 전복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반국가단체의 결성을 꾀했다. 그리고 '함성' '고발' 따위의 유인물을 통해서 북한 정권과 조선노동당의 활동에 동조했다.1972년 12월 전남대와 광주 시내 일부 지역에 뿌려진 '함성'은 그 해 10월17일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박정희 정권의 헌정 파괴 망동에 맞서 거의 최초로 들려온 저항의 목소리였다. 이 사건의 1심 재판에서 김남주, 이 강, 박석무는 징역 2∼3년을 선고 받았으나, 항소심에서는 김남주·이 강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 박석무에게 무죄가 선고돼 피고인들이 모두 풀려났다. 내란음모 재판치고는 다소 싱겁게 끝난 셈이었지만, 수사 과정은 참혹했던 듯하다. 이 때의 체험을 형상화한 듯한 김남주의 시 '진혼가' 한 대목은 이렇다.
"총구가 나의 머리 숲을 헤치는 순간/ 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주겠노라고/ 혓바닥을 내밀었다/ 기꺼이 노예가 되겠노라 당신의/ 발 밑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의/ 양심 나의 싸움은/ 심연으로 떨어졌다 삽살개가 되라면/ 기꺼이 삽살개가 되어 당신의/ 손이 되어 발가락이 되어 혀가 되어// 삽살개 삼천만 마리의 충성으로/ 쓰다듬어주고 비벼주고 핥아주겠노라/ 더 이상 나의 육신을 학대 말라고/ 하찮은 것이지만 육신은 나의/ 유일한 확실성이라고 나는/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나는/ 손발을 비볐다 나는."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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