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격으로 무너진 건물의 외벽으로 몸을 숨기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저격수의 총탄이 귓전을 스친다. 이중 한발이 동료의 철모를 맞고 튀어나갔다. 깨진 창문 틈으로 밖을 내다보니 목표 건물 지붕에 조준경이 번쩍인다. 바로 저거다. 라이플을 바꿔 쥐고 총구를 겨눴다. 내가 방아쇠를 당기면 나머지 분대원들이 진입할 것이다. 한 발의 총성, 저격수는 제거됐다. 그러나 건물 입구에는 독일군의 기관총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차', 이미 늦었다. 분대원은 전멸하고, '임무 실패'(Mission Failed)의 메시지가 떠오른다.
*전장(戰場)의 경험을 눈앞에
'메달오브아너', '울펜쉬타인' 등의 게임에서 게이머는 1940년 유럽의 전장으로 뛰어든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나 베를린 시가전, 후방 침투 등 다양한 임무 시나리오 속에서 독일군 혹은 미국 병사가 되는 것이다. 게임이 시작되면 화면에는 탄흔으로 얼룩진 풍경과 동료들의 모습, 그리고 소총이 쥐어진 자기의 손을 볼 수 있다. 주인공의 눈으로 게임에 뛰어드는 '1인칭 액션게임'(FPS)의 시각이다.
현실을 쏙 빼닮은 3차원 그래픽 화면과 서라운드 사운드는 현실감을 더욱 높인다. 발자국 소리, 총탄 소리, 작전을 지시하는 장교의 목소리, 때로는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동료나 적들이 비명소리까지 들린다. 이쯤이면 실제인양 극도로 소심해지는 마음을 억누르게 된다. 일종의 전투 시뮬레이터인 셈이다.
"쏟아지는 총탄 사이를 뚫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순간이 가장 흥분되죠. 건물의 모서리를 돌아가거나 문을 열고 들어갈 때는 적이 튀어나와 총구를 들이대지 않을까 겁이 납니다. 그러나 탄창이 바닥나도록 방아쇠를 당겨 낙엽처럼 쓰러지는 적군을 보면 팽팽하게 달아오른 긴장감이 탁 풀어지면서 승리의 쾌감을 맛볼 수 있죠." 밀리터리(군사) FPS를 즐기는 회사원 이형수(31)씨의 말이다.
*파괴와 살육의 미학
'퀘이크 어레나', '언리얼 토너먼트'는 훨씬 공격적이다. 미래, 혹은 은하계의 다른 장소에서 주인공은 쫓고 쫓기는 죽음의 게임을 벌인다. 때로는 '하프라이프'나 '둠'처럼 악령이 지배하는 미지의 괴물들과 인류의 미래를 건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 FPS의 다른 한 축을 차지하는 이런 류의 게임에선 '추적과 파괴'가 주제다. 망치나 톱 같은 단순무식한 무기부터 광자총(Photon Gun), 로켓포, 심지어는 초소형 핵폭탄에 이르기까지 수십가지의 무기를 동원해 적을 섬멸한다.
1인칭이라는 설정과 실감나는 화면 및 사운드는 주인공이 '나'라는 느낌을 강화하고 파괴의 쾌감을 끌어올리는 중요한 장치다. 군사전략 FPS와 달리 선악구조가 확실하고, 인간이 아닌 적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지나친 폭력도 허용된다. 때로는 로켓포에 맞은 적의 몸이 파편이 되어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적을 연속으로 쓰러뜨릴수록 높은 점수를 받는다. "TV 콘솔 게임기 앞에 앉아 하루 종일 쌓인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에는 최고"라는 것이 FPS 마니아 윤진수(24)씨의 말. 인터넷 상에서 팀끼리 붙는 클랜(Clan) 경기를 할 때는 같은 팀 동료와 전우애마저 느낀다고 한다.
*지나친 폭력성으로 비판 받기도
1990년대 초반 유명한 '둠' 시리즈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FPS는 미국과 유럽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게임 장르다. 월드사이버게임(WCG)에서도 언리얼토너먼트 등 FPS 종목에서는 유럽 아마추어들이 국내 프로 선수들을 압도한다.
국내에서는 밀리터리 FPS의 인기가 더 높다. 경찰 특공대의 테러리스트 제거 임무를 소재로 삼은 '레인보우 식스'가 대표적. 과거 게임방에서 스타크래프트와 쌍벽을 이루는 인기를 누렸으며, '하프라이프: 카운터스트라이크' 시리즈가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FPS 마니아들을 대상으로 국내 업체들의 온라인 FPS가 등장하면서 롤플레잉 일색인 온라인 게임 장르에도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해외에서는 FPS의 폭력성에 대해 잦은 비난이 나오기도 한다. 청소년 총기 사고로 골치를 썩고 있는 미국의 교육단체들은 'FPS를 성인 전용으로 제한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하도록' 해주는 FPS의 매력은 "TV 카메라의 일방적인 1인칭 시각에 익숙해진 현대인에게 뿌리칠 수 없는 재미로 자리잡았다"는 것이 게임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정철환기자 plomat@hk.co.kr
●요즘뜨는 FPS게임들
◆카운터 스트라이크 시리즈
1998년 등장한 하프라이프(Half-Life)의 온라인 멀티플레이어 판으로 등장, 레인보우 식스의 인기를 물려받았다. 온라인 상에서 테러리스트와 반테러부대의 두 팀을 이뤄 겨룬다. 폭탄 설치, VIP 암살, 인질 구출 등의 임무가 있다. 게임 내용은 매우 사실적인 편으로, 영웅적인 돌격보다 팀워크가 더 중요하다. 최신작 '컨디션 제로'가 PC용으로 출시됐다.
◆메달오브아너 시리즈
무려 4편의 후속편을 내놓고 있는 밀리터리 FPS의 역작이다. 2차 대전의 역사적 실화를 바탕으로 유럽과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추축국(Axis)의 군대와 맞서 싸운다. 철저한 고증아래 다양한 무기와 실전 상황이 재현됐고, 강력한 액션과 치밀한 전술적 움직임을 강조한다. 시나리오를 따라 혼자 즐기기에 딱 좋은 게임. PC·X박스·PS2.
콜 오브 듀티
메달오브아너의 증보판에 해당하는 이 게임은 훨씬 치밀한 그래픽과 다양한 플레이 선택 옵션을 제공한다. 기본으로 온라인 멀티플레이 기능을 제공하며, 미군 뿐만 아니라 영국군 특수부대, 소련 병사의 시점에서 게임을 즐길 수 있다. PC·X박스·PS2
◆리미트 온라인
인간과 인간형 로봇(안드로이드)간의 미래 전쟁을 소재로 한 온라인 FPS다. 만인 대 만인의 싸움으로 특징지어지는 퀘이크 류의 액션 FPS 장르로서는 드물게 게임 결과에 따라 진행이 달라지는 다중 시나리오 모드를 갖췄다. 게임 내에 등장하는 무기는 모두 실존하는 것들이다. 한게임(www.hangame.com)에서 PC용으로 서비스하고 있다.
◆언리얼토너먼트(UT) 시리즈
FPS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게임이다. 먼 미래의 우주를 배경으로 인간을 포함해 다양한 외계 인종들이 혈전을 벌인다. 강력한 액션과 무자비한 폭력성으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다. 팀 플레이, 깃발 뺏기, 데쓰 매치 등 다양한 멀티플레이가 지원된다. 'UT 오리지널'과 'UT 2003'에 이어 최근 'UT 2004'가 출시됐다. PC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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