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챙이·뱀·매 살고 소나무숲 복원남산은 섬이다. 사이좋게 어깨동무 하고 있던 이웃산들과 뚝 끊어져 도심 속에 고립된 '생태의 섬'이다. 도로가 나면서 잘려진 산허리가 아직도 뻐근한데 사람들에 시달리랴 자동차에 들볶이랴, '서울의 허파' 남산은 날마다 숨이 차다. 그런 남산에 개구리가 돌아왔다. 생태계 회복의 청신호라고 야단들이다. 개구리뿐이 아니다. 개구리 알더미 옆에선 도롱뇽 알도 발견됐고, 야외 식물원 부근에는 80년대 들어 눈에 띄지 않던 뱀의 출현도 잦아졌다. 지난해 봄엔 장정 손바닥만한 긴꼬리제비나비도 야생화정원 위로 날아다녔고, 좀처럼 볼 수 없던 이끼들도 바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도대체 남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젠 제 발로 찾아오게 해야
남산의 생태지도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서울시가 1991년 '남산 제모습 찾기 사업'을 시작한 지 13년이 지난 지금. 외인아파트가 철거된 자리엔 1만8,000평 규모의 야외식물원이 들어섰고, 91년 이래 꾸준히 진행된 소나무 식재 사업으로 헐벗었던 붉은 산은 푸른 기색을 되찾아가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개구리 알은 서울타워 밑 소나무 숲의 실개울에서 주로 나왔다. 2000년 반딧불이 서식지로 만들었다가 실패하고 남겨진 웅덩이다. 여기저기 연초록빛 알더미들이 보이고, 일부는 그새 올챙이로 부화해 파르르르 꼬리를 떨며 실개울을 헤엄쳐 다닌다. 그 옆으론 도롱뇽 알도 보인다. 끌어들이지도 않았는데 모두 저절로 찾아왔다. 방사 후 실종돼버린 고라니 때와는 경우가 다르다. "억지로 끌어다 풀어놔봤자 뭐 합니까. 버텨내지를 못 하는 걸. 살 수 있는 환경만 만들어주면 곤충이든 동물이든 다 자연스럽게 찾아오게 돼 있어요." 서울시 공원녹지관리사업소의 최병언 팀장의 얘기다.
◆먹이연쇄 따라 생태도 연쇄복원
개구리 알이 발견된 소나무 숲은 사람의 출입이 제한되는 곳. 초록색 철제 울타리가 높다랗게 둘러쳐져 있다. 그러나 발걸음을 뗄 때마다 울타리 밑 개구멍으로 들어와 숲을 헤집고 다니는 사람들과 마주치게 된다. 남산공원관리사무소 윤성민씨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아주머니들, 정말 전기 철조망으로 바꿔야 안 들어오시겠어요? 여기 사람 못 들어오는 곳인 거 아시잖아요." 노랑, 분홍색 등산잠바로 한껏 멋을 낸 중년부인들이 "아이고, 미안해요"를 연발하며 종종걸음으로 내뺀다.
개구리는 그 지역의 생태환경지수를 나타내는 환경지표동물로 그 자체 물의 오염도와 숲의 건강함을 나타내는 증표지만, 무엇보다도 야생동물의 생존에 필수적인 먹이사슬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개구리가 오면 뱀이 따라오고, 뱀이 오면 매가 따라오는 식이다. 지난해부터 눈에 띄기 시작한 뱀허물이 이미 개구리알의 발견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강원도에서 기증한 소나무에는 매의 한 종류인 새홀리기도 둥지를 틀었다.
그러나 개구리 알이 나왔다는 신문기사가 나간 후 일부 몰지각한 시민들이 금지구역인 이곳에 들어와 페트병으로 알을 퍼갔다. 보신에 좋고 희귀병에도 효험이 있다는 속설 때문이란다. 더러는 학습교재용으로도 가져갔다. 관리사업소가 공익근무요원들을 급파해 개구리알을 24시간 사수하도록 조처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소나무가 철갑을 두를 때까지
남산을 대표하는 나무는 역시 소나무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애국가 가사가 아니더라도 남산은 역사적으로 소나무가 울창한 숲이었다. 우리나라 토종 소나무는 껍질이 약간 붉고 수령이 오래될수록 거북이 등처럼 수피가 갈라지는 특징이 있다. 조선조에선 이를 용의 비늘 형상이라고 해 왕의 존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금송령(禁松令)이 자주 내려졌고 백성들은 함부로 소나무를 벌채하지 못했다. 애국가가 말하는 철갑이란 이 비늘모양을 말하는 것으로, 마치 갑옷을 입은 장군처럼 소나무를 그렸다. 작곡 당시만 해도 남산의 소나무가 크고 울창했음을 짐작케 한다.
흔히 남산의 소나무가 훼손된 것은 일제가 강제로 심은 아까시나무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상 그 부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아까시나무가 남산의 주요수종이 된 것은 60년대 이후. 한국전쟁으로 벌거숭이가 된 남산을 이른 시일 내에 녹화하기 위해 생장력이 왕성한 아까시나무를 대거 심었다. 당시 우리나라 환경정책이라는 게 그랬다.
그 아까시나무를 뽑아내고 소나무를 심는 작업이 꽤 성과를 거둬 현재 남산에는 아까시나무를 제치고 신갈나무 다음으로 소나무가 많다. 다른 시도군에서 기증받아 옮겨심은 1만 8,000그루를 포함해 약 3만1,000그루가 모두 다섯 군데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식물주권'을 어느 정도 회복한 셈이다. 하지만 100년 이상 되는 노거목은 그 중 6그루뿐이어서 철갑을 두른 소나무들을 보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
◆"이제 고작 위기 넘겼을 뿐"
하지만 남산은 아직 목마르다. 녹지축이 단절되면서 수맥도 함께 끊겨 남산에 남은 물줄기라곤 약수터 두 군데뿐이다. 그나마도 사람들이 닥치는 대로 뽑아간다. 30년 가까이 남산연구에 매달려온 서울시립대 이경재 교수(건축도시조경학부)는 "마음 같아선 스프링쿨러라도 설치해 막 뿌려대고 싶은 심정"이라며 "남산 생태계의 많은 문제들이 물 부족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이제 겨우 위기를 넘겼을 뿐"이라고 말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잎사귀며 줄기마다 미세먼지가 더덕더덕 붙어있어요. 이런 건 남산만 손을 대서는 해결할 수 없죠. 1,000만 서울시민이 달라지기 전엔 안될 겁니다." 그는 부분적으로 좋아진 측면이 있지만 좋아졌다고 말하기가 두렵다고 했다. 그것이 사람들과 살을 섞고 살아야 하는 남산의 운명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남산의 수난史/日帝가 신궁 세우며 난도질 3共때 터널 뚫어 "심장관통"
남산에서 호랑이를 봤다는 할머니 말은 사실일까, 아닐까.
일제 때까지만 해도 남산은 혼자 다니기 무서울 만큼 울창한 숲이었다. 조선은행에 폭탄을 투척하고 남산으로 숨어든 애국지사를 일제가 끝내 못 잡아냈을 정도였다. 이경재 교수는 "기록상으로는 1928년 경주 남산에서 잡힌 호랑이가 이 땅의 마지막 야생 호랑이었지만, 남산이 인왕산 등과 연결돼 있던 시절에는 남산이 호랑이의 이동통로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우거졌던 남산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개화기 무렵 남산 북쪽면에 일본인 집단거주촌이 생기면서부터. '남산공원의 역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박인재 월드컵공원관리사무소장에 따르면 신사가 필요했던 일본인들이 지금의 식물원 자리에 신궁을 세우고 길을 닦으면서 남산에 첫 '칼질'이 시작됐다.
광복 이후 이승만 초대정부는 조선신궁을 철거하고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짓기로 결정했다. 전후 복구사업과 함께 공사가 한창이던 1956년 8월15일. 이승만 전 대통령의 나이 81세에 맞춰 81척(25m) 높이의 대통령 동상이 지금 분수대 자리에 세워졌다. 그러나 4·19 혁명이 일어나자 동상은 성난 학생 시위대에 의해 광화문으로 끌려나가 부서져 버렸고, 본디 우남정이었던 팔각정의 이름도 바뀌었다.
5·16 군사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남산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던 국회의사당 공사는 중단됐다. 대신 그 자리에 야외음악당이 들어섰다. 그러나 68년부터 차례로 뚫린 남산1, 2, 3호 터널이 남산의 심장을 관통했고, 76년에서야 숲을 보호하기 위해 처음으로 펜스가 설치됐다.
/박선영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