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6년 3월29일 코르시카 아작시오의 부오나파르테가(家)에 카를로라는 아이가 태어났다. 당시 코르시카는 제노바 영토였다. 부오나파르테가도 이탈리아계의 한미한 귀족 가문이었다. 자라서 사무변호사를 생업으로 삼은 카를로 부오나파르테는 코르시카 독립 운동의 지도자 파스콸레 파올리의 비서로 정치에 발을 담갔다.코르시카인들의 거듭된 반란에 골머리를 앓던 제노바 정부는 1768년 이 섬을 프랑스에 매각했다. 파올리는 프랑스에 맞서 다시 거병했지만, 프랑스군은 이듬해 폰테노보에서 반란군을 대파하고 코르시카를 평정했다. 부오나파르테는 가족과 함께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그의 아내 레티치아의 뱃속에는 둘째아들 나폴레오네가 있었다. 혁명군 지도자 파올리가 국외로 망명하자, 부오나파르테는 약삭빠르게 프랑스측에 붙어 아작시오 재판소의 판사 보좌역과 코르시카 삼부회 의원을 지냈다. 성(姓)도 프랑스어식으로 보나파르트로 바꿨다. 본토를 오가며 한량 생활을 하던 보나파르트가 1785년 39세로 몽펠리에에서 객사했을 때, 그가 가족에게 남긴 돈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이탈리아의 제노바 사람이나 코르시카 사람이 되기를 거부하고 프랑스 사람이 되기로 결정한 '기회주의적' 처신이야말로 가장 큰 유산이었음이 뒷날 드러났다.
카를로 보나파르트의 유족으로는 아내 외에 자녀 여덟이 있었다. 프랑스어식으로 나폴레옹이 된 둘째아들 나폴레오네는 1804년 프랑스 황제가 된 뒤 형제들 거의 전부를 유럽의 군주나 대귀족으로 만들었다. 넷째아들 루이지(루이)의 아들 샤를루이 역시 1852년 나폴레옹3세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황제가 되었다. 카를로 보나파르트가 죽은 1785년은, 네 해 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의 둘째아들 대신 프랑스 군주가 되었을 루이샤를(27일자 '오늘' 참조)이 태어난 해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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