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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죽음 앞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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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죽음 앞의 인간

입력
2004.03.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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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아리에스 지음·고선일 옮김 새물결 발행· 4만3.000원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에 신문을 읽는 독자들에게 죽음에 관한 책을 소개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죽음 앞의 인간'을 권하는 것은 죽음의 쌍둥이 형제인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기 위함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1914∼1984)가 쓴 이 책은 서구 기독교 문명권에서 죽음에 대한 태도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추적한다. 1,100쪽이 넘는 이 두툼한 책에서 그는 죽음에도 역사가 있어서 시대마다 사람들은 죽음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또한 다르게 죽어갔음을 보여준다.

그가 다루는 시간은 중세 초기부터 현대까지 약 1,000년이다. 이 장구한 세월 동안 죽음의 얼굴이 어떻게 변모해왔는지 파헤치기 위해 그는 개인의 일기와 편지, 유언장 같은 비공식적 기록을 비롯해 그림과 조각, 문학작품, 묘지와 장례제도 등 죽음을 말하는 온갖 자료를 샅샅이 뒤지고 있다. 그 치밀함과 방대함은 기가 질릴 정도다. 그러나, 겁 내지는 마시라. 이 책은 결코 어렵게 씌어진 게 아니다. 긴 호흡으로 따라갈 마음의 여유만 있다면, 이보다 흥미롭고 풍성한 읽을거리도 없을 듯 싶다.

그에 따르면 서양에서 죽음의 관념은 시대에 따라 다섯 번의 변용을 거쳤다. 중세 초기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명제로서 누구나 지극히 자연스럽고 일상적으로 받아들인 '우리의 죽음', 중세가 끝나갈 무렵 개인주의와 함께 찾아온 '나의 죽음', 죽음을 거부하면서도 시체의 관능성에 빠져들었던 17, 18세기 바로크 시대의 '가깝고도 먼 죽음', 자신의 죽음조차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통해 바라보던 낭만주의 시대 '타인의 죽음', 낭만주의적 환상이 완전히 깨지고 죽음을 말하는 것조차 터부가 되어버린 오늘날의 '역전된 죽음'이 그것이다.

그에 따르면 개인 의식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중세 초기의 죽음은 개인적 공포가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것으로서 공동체의 손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중세 말이 되면 공동체의 해체가 진행되면서 죽음은 개인의 사건이 되고 그만큼 홀로 맞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커진다. 죽음의 승리를 말하는 이른바 '죽음의 무도' 그림들이 크게 유행한 것이 바로 이 때다.

바로크 시대의 죽음은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기이하게도 해부학 열풍이 분 것이다. 교양인들은 집에 해부실을 두고, 대학의 해부학 공개강의는 연인들이 즐겨 찾는 데이트 코스가 되었다. 그렇게 죽음은 가깝고도 먼 것이 되었다.

낭만주의 시대 죽음은 사랑하는 이의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예술적 환상과 결부되면서 달콤하고 관능적인 무엇이 된다. 이는 죽음을 은폐하는 아름다운 가면 같은 것이었지만, 기독교 신앙의 힘도 낭만적 환상도 모두 사라져버린 오늘날 죽음은 그저 끔찍한 것일 뿐이다. 죽음은 병실이라는 격리된 공간에서 차갑게 일어나고 시체는 서둘러 깨끗이 치워진다.

아리에스는 "죽음에 대한 거부가 오늘날처럼 공공연하게 표출된 때는 없었다" 면서 "오늘날 진정으로 자신의 죽음을 문제시하고 이에 의식적으로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 두꺼운 책을 읽는 동안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죽음의 여러 차례 변용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강박관념이 전 시대를 관통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삶을 향한 열정의 통로가 아니던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인터넷 자살 사이트에서 만나 동반 자살하는 시대다. 적어도 죽음을 준비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어쩌면 죽음조차 아름답고 환상적인 무엇으로 치장하고 싶어했던 낭만주의 시대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역사학의 주제와 방법론의 혁신을 가져온 역작이다. 죽음이라는, 기존 역사학이 다루지 않던 주제를 파고 들었고, 정통 사료로 취급되지 않던 비공식적 기록과 각종 도상 자료를 통해 주제에 접근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미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책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필립 아리에스는 누구

필립 아리에스는 미시사와 생활사 중심의 역사 연구를 개척한 학자이다. 그는 학사(소르본느 대학) 출신이지만, 그의 생애와 학문세계를 분석한 박사학위 논문이 나올 정도로 프랑스 사학계에 미친 영향이 크다.

전통적 우파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국립도서관, 열대농업조사기관, 출판사 등을 전전하며 역사에 관심을 가졌다.

혁명사, 정치사 중심의 기존 연구에서 탈피해 묘비, 일기장 등 다양한 자료를 뒤져가며 새로운 글쓰기로 화제가 됐다. 그는 스스로 일요일에만 역사를 공부한다 해서 자신을 '일요 역사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동의 탄생'(1960)과 '서양에서의 죽음의 역사에 관한 에세이'(1975), '죽음 앞의 인간'(1977)을 내면서 명성을 날렸고,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의 연구주임 교수로 선출됐다. '사생활의 역사'(1983) 등 주요 저서가 있다. 출판사 근무 시절에는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거부당한 미셸 푸코의 책을 처음으로 출판했고, 이런 인연으로 아리에스가 죽었을 때 푸코는 르몽드 지에 추모사를 쓰기도 했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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