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의 '만성 환란국'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에는 끝이 보이질 않는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 22일 31억 달러의 차관집행을 공식 승인함으로써 아르헨티나는 초읽기에 몰렸던 디폴트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IMF-아르헨티나-민간채권단의 이해관계가 난마처럼 얽혀 있고, 엉킨 실타래를 풀어줄 중재자조차 없는 상태여서 1980년대 이후 지속적, 주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경제위기는 그 종착역을 가늠조차 하기 힘든 실정이다.아르헨티나와 IMF의 기싸움
아르헨티나는 최근 6개월간 IMF로부터 두 차례의 디폴트 위기를 맞았다. 지난해 9월 29억 달러의 차관만기를 앞두고 IMF는 GDP대비 5% 재정흑자목표달성 공공요금인상 금융개혁 등을 요구했지만, 아르헨티나는 '이런 가혹한 조건을 받느니 차라리 디폴트로 가겠다'며 거부했다. 차관 상환일을 하루 넘기는 벼랑 끝 협상 끝에 결과는 아르헨티나 정부의 판정승. IMF는 요구조건을 관철하지 못한 채 아르헨티나에 3년간 133억 달러의 차관을 추가 제공키로 합의했다. 협상을 주도했던 쾰러 IMF총재는 '너무 봐줬다'는 비판까지 받았다.
6개월이 지난 이달 초 IMF와 아르헨티나는 31억 달러의 만기 상환일을 앞두고 또 한차례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IMF측은 "아르헨티나가 민간채권단과 벌이고 있는 채무탕감협상에 진전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압박했지만, 아르헨티나 정부는 "그렇다면 31억 달러 차관도 갚을 수 없다. 디폴트도 불사하겠다"며 배수진을 쳤다.
결과는 또다시 아르헨티나의 판정승. 독일 대통령 출마를 위해 물러난 쾰러 총재 대신 강경파인 앤 크루거 수석부총재가 총대를 맸지만, 디폴트 마감 5시간을 앞두고 결국 아르헨티나 주장을 수용하고 말았다. 31억 달러를 상환 받고 다시 31억 달러를 지원하는 형식으로 아르헨티나의 디폴트를 막아준 것이다.
비난받는 IMF
아르헨티나에 대한 IMF의 태도에 대해 국제금융계에선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그저 빌려준 돈을 떼이지 않기 위해 아르헨티나의 '배째라'식 행태에 질질 끌려 다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IMF는 아르헨티나가 국제금융기구에 디폴트를 선언할 경우, 브라질 터키 인도네시아 같은 다른 채무국들에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자칫 이들 국가가 가혹한 구조조정 대신 손쉬운 디폴트를 선택하는 도덕적 해이를 유발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관건은 민간채권단
아르헨티나가 디폴트 위기는 넘겼지만, 진짜 고비는 민간채권단과의 협상이다. 아르헨티나는 대내외 민간금융기관에 채권형태로 880억 달러 규모의 빚을 지고 있으며, 이 채권은 미 달러화, 일본 엔화, 이탈리아 리라화, 스위스 프랑화 등 14개국 통화로 무려 152종이나 발행되어 있다. 그만큼 채권단 구성 자체가 복잡한 것이다. 지난해 9월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 채권을 75% 탕감하는 외채조정안(두바이 제안)을 제시했지만 채권단은 35% 이상 탕감은 불가능하다며 아르헨티나 정부제의를 일축해 버렸다.
물론 채권단으로선 '디폴트 불사'를 외치고 있는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채권회수를 강제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채권단과 채무조정협상에 진전이 없으면, 아르헨티나 정부는 IMF의 추가차관도, 중장기적 경제회생의 관건인 외국인 투자유치도 기대하기 어렵다. 스스로 채권자인 IMF 역시 아르헨티나-민간채권단 협상에 가급적 개입을 꺼리는 분위기다. 어떤 형태로든 절충과 타협의 필요성은 절실하지만, 3자의 속내가 모두 다르고 이를 중재할 기구도 없는 상황이다. 아르헨티나의 위기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만성화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페론주의자
국제금융계는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네르 대통령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다. 채무자로서 고개를 숙이기는커녕 오히려 IMF와 채권단 요구에 정면으로 맞서는 그의 강경 일변도 정책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지난 10일 IMF와 31억 달러 상환협상이 끝난 뒤 "우리의 최우선 과제는 (해외채무보다) 내국인 채무를 상환하는 것이다"고 밝혀, 해외 채권단의 분노를 또다시 야기하기도 했다.
키르치네르 대통령의 이 같은 강성 행보는 그가 페론당 출신이란 사실과 연결된다. 대량실업사태에 직면하고 있는 키르치네르 대통령으로선 금융구조조정 공공요금현실화 재정긴축 등 경제적 고통을 수반하는 IMF 프로그램을 수용할 경우, 거센 대중적 반발에 직면해 정치기반 자체가 와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일각에선 포퓰리즘 성향의 페론주의자가 집권하고 있는 한 아르헨티나 대외채무협상은 쉽게 타결되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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