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나의 이력서]공동善 지킴이 서영훈 <3> 族靑에서의 활동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나의 이력서]공동善 지킴이 서영훈 <3> 族靑에서의 활동

입력
2004.03.25 00:00
0 0

나는 광복군과 함께 일할 운명이었다. 해방 후 한 1년간 공산치하에 있다가 월남해 찾아간 곳이 바로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철기 이범석(李範奭) 장군의 조선민족청년단이었다. 족청(族靑)이라 불렸던 이 단체는 오늘날까지 60년 가까이 이어오는 나의 사회운동, 단체운동의 시발이 되었다.철기 장군이 광복 후 청년들을 위한 훈련기관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광복군 핵심 인사들을 주축으로 1946년 10월 설립한 청년운동단체가 족청이다. 나는 10월9일 청년단 1기 훈련생으로 입소해 수원에 있는 중앙훈련소에서 1개월 동안 훈련을 받았다. 훈련이 끝난 후 면접을 치렀는데 논문을 잘 쓰고, 사상서와 사회과학 서적을 많이 섭렵한 것이 평가돼 중앙훈련소 교무처의 간부요원으로 채용됐다.

족청은 뒤에 정치적으로 오해도 받았지만 창립 당시에는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민족의 새 역사를 짊어질 청년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운 순수한 민족간부 양성 단체였다. 23세 겨울부터 25세 가을까지 2년 동안 나는 족청에서 여러 민족지도자들과 석학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安浩相),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하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사퇴했던 설의식(薛義植), 경제학자 배성룡(裵成龍), 연세대 교수 고승제(高承濟) 선생 등이 고정 강사였다. 정인보 안호상 선생이 강의를 가장 많이 했다. 당시 청년들이 우러러보던 김구(金九) 조소앙(趙素昻) 신익희(申翼熙) 선생 같은 지도자들도 자주 가르침을 주었다. 공산진영을 제외한 민족진영의 지도자 대부분이 강단에 섰다.

족청은 모두 14∼15차례 훈련생을 모집해 배출했다. 나는 중앙훈련소 교무처에서 고핵(考核)과장으로 교안을 짜고, 강의기록을 정리하는 한편, 훈련생들의 신상과 인물 평가 자료를 정리하는 일을 했다. 강사들을 모셔오는 것도 내 몫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많은 이들을 알게 됐다.

간부 지도진의 선배로는 임시정부 군무부 총장 노백린(盧伯麟) 장군의 아드님인 노태준(盧台俊) 장군, 안춘생(安椿生) 전 독립기념관장, 광복군 정훈처장을 지낸 송면수(宋冕秀), 조일문(趙一文) 전 건국대 총장, 장준하(張俊河) 전 사상계 발행인, 박영준(朴英俊) 전 광복회장, 유해준(劉海濬) 장군 등이 있었다. 동료로는 김철(金哲) 전 사회당 당수, 김동욱(金東郁) 전 국회의원, 함인영(咸仁英) 전 상공부차관, 안준표(安俊杓) 전 신민당 정책기획실장 등을 사귀었다.

청년단은 7기와 10기 때 여성들도 훈련시켰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 김정례(金正禮) 전 국회의원, 첫 여성판사 황윤석(黃允石)씨 등을 그 때 만났다.

당시 지방 사람들이 올라오면 나를 대단한 광복군 출신인줄 알았다. 만약 18세 때 중국으로 탈출했더라면 정말 광복군의 핵심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광복군 출신이라고 하여 다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 중에는 인격이나 행동이 훌륭하고 친근감이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뒤에 알게 되지만 광복군 출신이라고 하여 다 같이 독립운동을 제대로 했거나 민족의식이 투철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나로 하여금 내심 갈등을 느끼게 한 것은 이미 내 속에 자리 잡힌 톨스토이사상과 투쟁을 지상으로 하는 분들과의 조화였다. 과거 항일투쟁을 했던 일부 인사들은 지나치게 투쟁을 강조하는 부분이 많아 나는 내심 적잖은 갈등을 겪어야 했다. 족청이 내건 슬로건 '민족지상 국가지상'도 순수한 민주주의와는 뉘앙스에서 차이가 느껴졌다.

그렇지만 김구 선생을 비롯해 정인보 조소앙 신익희 선생, 철기 장군의 열렬한 애국적인 열정에는 감동을 많이 받았다. 그 뒤로 인도주의와 함께 우리 민족의 주체성, 민족 역사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 이 둘이 내 속에서 병존하게 됐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