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영암을 가리켜 "서해와 남해가 서로 맞닿은 곳에 있어 신라가 당나라에 들어갈 때는 모두 이곳 바다에서 배가 떠났다"고적었죠. 당시 영암의 국제적 무역항이 바로 구림마을입니다. 백제시대에는 상대포로 불리며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건너갔던 항구이기도 하고요.영문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냐'는 말이 나올 법 합니다. 구림마을 주변에는 너른 논과 저수지 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50년대만 해도 구림마을 앞에는 바닷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현재의 논과 저수지는 60년대와 80년대에 이어진 간척사업으로 새로 조성된 것이죠.
그 결과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떠났다는 항구인 상대포는 흔적도 없이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썰렁한 저수지만 조금 남겨놓은 채. 영암 도기문화센터의 한 관계자는 "그대로 남겨뒀으면 오늘날 관광사업으로 훨씬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더군요.
몇십년 전에 이뤄진 간척사업의 실효를 지금 와서 따지는 것은 어부성설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만은 새겨들었으면 합니다. 60년대 간척사업이 진행될 때, 구림마을 앞 바다를 메우는데 사용됐던 흙과 돌은 어디서 왔을까요. 박정웅 영암군 문화재전문위원은 "당시 월출산에 있던 거대한 산성을 모두 허물어 그 돌로 바다를 메웠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최근 학계에서 월출산의 산성이 마한시대에 건축됐다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월출산 산성은 당시 간척산업으로 거의 모두 없어졌고, 사람들의 손길이 닿기 힘든 곳에 극히 일부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적이 전쟁도 아닌 평시에, 그저 땅을 메우기 위한 한갓 돌로 사라졌던 것입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개발의 역사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박 위원의 씁쓸한 말이 귓가를 맴돕니다.
/송용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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