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이지만 공기가 탁하다. 따뜻해진 대지가 내뿜는 뿌연 온기에 불청객 황사까지 가세했다. 앞산조차 윤곽만 희미하게 보이는 날이 많다.정신이 번쩍 날 정도로 맑은 곳을 찾아간다. 아예 적도를 넘어 남반구로 향한다.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Fiji). 굴뚝이 없는 나라, 언제나 맑은 해풍이 티끌을 거두어 가는 나라. 하늘과 땅이 처음 열렸을 때 존재했을 법한 진공과 같은 명징(明澄)함을 느끼게하는 곳이다.
피지는 원래 화산 작용으로 솟아오른 화산섬의 군락이다. 물속 분화구가 바닷물의 온도를 높여 따뜻한 물을 좋아하는 산호를 불러모았다. 그래서 피지는 화산섬의 역동성과 산호섬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곳이 됐다. 두 가지를 모두 즐기는 포만감, 피지의 매력이다.
피지는 '휴식의 여행지'이다. 아무 생각없이 해변에 누워 나른함을 만끽하거나 해변의 침대에 누워 책을 읽는 여행객이 많다. 호주나 뉴질랜드에서 온 벽안의 여행객들은 대부분 이렇게 쉬면서 피지를 즐긴다. 해변을 따라 지어진 많은 리조트나 호텔의 객실에는 TV가 없다. 심지어 전화조차 없는 곳도 있다. 일상으로부터의 완전 탈출이다. 리조트나 호텔은 높지 않다. 기껏해야 2층 정도이다. 객실 바로 앞은 바다. 무료해지면 물속에 뛰어들어 남태평양의 바다를 즐긴다.
그러나 동양 여행객, 특히 다이내믹한(?) 한국 여행객에게 이런 서양식 휴식법은 답답하다. 대안은 얼마든지 있다. 우선 섬의 안쪽으로 향한다.
피지는 3개의 큰 섬을 포함한 330여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본섬인 비티레부의 면적은 제주도의 약 3배. 1,000m에 가까운 산봉우리들이 있다. 산이 있으면 골이 있는 법. 골짜기를 따라 맑은 물이 흐른다. 물은 평평한 곳을 흐르기도 하지만 격한 지형에서는 큰 폭포를 이룬다.
폭포는 바닷가에서 걸어서 30분∼1시간 거리에 있다. 이런 폭포를 즐기는 트레킹 프로그램이 있다. 원주민의 안내를 받으며 원시림으로 난 좁은 길을 걸어 간다. 온갖 열대의 아름다운 꽃과 새들이 눈과 귀를 쉬지 못하게 한다. 이마에 땀이 맺힐 무렵이면 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폭포 아래에는 언제나 웅덩이가 있는 법. 옷을 벗으니 모두 수영복 차림이다. 맑은 웅덩이로 풍덩풍덩 들어간다. 트레커들이 땀을 씻는 동안 원주민들은 열대 과일을 한상 푸짐하게 차려 놓는다.
작은 섬으로의 여행도 매력적이다. 모두 330여 개의 섬이 있지만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150여개이다. 무인도의 절반은 썰물이면 나타났다가 밀물이면 사라지는 섬이다. 야자수가 살아 있는 섬, 즉 밀물 때에도 남아있는 섬은 거의 대부분 리조트 시설을 갖추고 있다. 본섬에서 배나 경비행기, 헬기를 타고 작은 섬으로 이동해 즐긴다. 당일 프로그램이 일반적이지만 숙박 시설이 있는 섬에서는 며칠 지내고 나오기도 한다.
국제공항이 있는 본섬의 난디 선착장에서 쾌속선으로 1시간20분, 경비행기로 13분 거리에 있는 마나섬이 동양 여행객에게 인기가 높다. 선착장, 경비행기 활주로는 물론 200여 개의 객실과 다양한 레스토랑, 바를 갖추고 있다. 물이 맑아 스노클링과 카누를 즐기기에 좋고 일출과 일몰이 아름답다.
돛단배(범선)를 타고 더 먼 바다로 나서는 크루즈 여행도 즐겁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하루 일정으로 되어 있다. 범선의 승선 인원은 30∼40명. 인근 섬에서 크루즈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작은 배를 타고 범선에 모인다. 인종이나 나라가 각양 각색이다.
처음에는 모두 어색하다. 원주민 가이드가 능숙하게 개인개인 모두를 소개하며 분위기를 바꾸어 놓는다. 20여분만에 모두 어색함을 벗고 손짓발짓을 동원해 이야기꽃을 피운다.
점심식사는 선상 바비큐이다. 4∼5명의 선원들은 뱃사람이자 훌륭한 요리사이다. 능숙한 솜씨로 고기와 소시지를 굽고 샐러드를 만든다. 푸른 물에 둥둥 떠서 와인이나 맥주와 함께 하는 바비큐 파티. 기억에 남지 않을 수 없다.
범선 크루즈의 행선지는 다양하다. 요즘에는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캐스트 어웨이'가 촬영됐던 몬드리키섬이 인기가 높다. 백사장에 누군가 나뭇가지를 이어서 'CASTAWAY'라고 커다랗게 써놓았다. 섬 인근에 배를 대고 작은 배로 이동해 섬에서 스노클링을 한다. 10m 이상의 바닷속까지 훤히 들여다 보일 정도로 물이 맑다.
선원들은 또한 훌륭한 가수이기도 하다. 피지 원주민들은 악보를 읽는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만 들으면 그대로 따라 부르는 음악성을 지니고 있다. '아리랑' '사랑해 당신을' 등 한국노래를 따라 부르는 데에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대부분 통기타를 친다. 이들은 크루즈 내내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러준다.
해가 뉘엿뉘엿할 때 출발지로 돌아온다. 각자의 섬으로 헤어져야 하는 여행객들의 얼굴에 서운함이 가득하다. 선원들이 마지막 노래를 부른다. 귀에 익다. '웃음 짓는 커다란 두 눈동자/ 긴머리에 말없는 웃음이…'라는 가사가 떠오른다. 1970년대 가수 윤형주가 불렀던 '우리들의 이야기'와 같은 멜로디이다. 피지의 민족가요인 '이별의 노래(이사레이)'란다. 흥얼흥얼 따라 부르자 선원들이 오히려 고개를 갸웃한다.
/피지=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 피지는 어떤 나라
피지 군도에는 3,500년전부터 사람이 살았다. 1874년부터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다가 1987년 10월 독립해 현재는 수상과 의회를 가진 피지공화국이다. 면적은 1만8,272㎢. 경상남·북도를 합친 크기이다. 수도는 본섬인 비티레부 동남쪽의 수바.
원주민은 피부에 멜라닌색소가 많은 멜라네시안이다. 원래 동양인 정도의 체구였는데 인근 통가족의 오랜 지배를 받으며 피가 섞여 덩치가 우람하고 완전한 곱슬머리로 체형이 바뀌었다. 여성도 남성적(?)이어서 턱에 수염이기도 한다.
20세기 초 영국에 의해 사탕수수재배가 시작됐고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인이 많이 유입되었다. 약 80만 명의 인구 중 본토인은 49%, 인도인이 46%를 차지한다. 두 민족은 외형상 확연히 구분된다.
피지는 19세기 중반까지 식인습관이 있었던 곳. 부족간에 전쟁을 해서 이겨도 패배한 부족이 복종하지 않았다. 승리한 족장이 패한 족장의 살점을 취하면 영혼이 옮아간 것으로 여겼고 그제서야 다스릴 수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생긴 식인의식은 서양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모두 사라졌다.
피지 여행에서는 원주민 마을에 한두 번 들르게 된다. 이 때 '카바(혹은 양고나)'라는 의식을 치른다. 족장과 주민의 환영식이다. 고추와 비슷한 식물의 뿌리를 말려 가루로 만들고 천에 담아 물로 우려낸다. 원주민이 즐겨 마시는 일종의 술로, 알코올은 없지만 혀가 약간 얼얼할 정도의 마취 성분이 있다.
마을에 들어갈 때 주의사항. 머리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까닭에 모자를 쓰거나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큰 결례이다. 평소 온순하지만 결례를 보면 크게 불쾌해한다.
● 피지 여행땐
피지 입국시 4개월의 관광비자를 받는다. 단 3개월 이상 유효한 여권과 피지를 떠날 때의 항공기 티켓이 있어야 한다. 필요시 2개월을 연장할 수 있다. 대한항공이 인천공항과 피지의 난디국제공항을 주 2회 왕복운항한다. 떠나는 날은 월·금요일(오후 7시40분 출발)이고 난디를 출발하는 날은 화·토요일이다. 시차는 한국보다 3시간 빠르다.
화폐는 피지 달러(FJD)로 1FJD는 약 750원. 한국에서 US달러로 환전한 후 현지에서 바꿔야 한다. 대부분의 호텔이나 리조트에서 환전이 가능하다. 전력은 240볼트. 팁은 공식적으로 없지만 마음에서 우러날 경우 1FJD정도면 된다. 피지에는 말라리아나 황혈병 등 풍토병이 없다. 그러나 모기에 물린 가려움은 위력적이다. 물리기 전과 후의 모기약을 모두 챙기는 것이 좋다. 자외선 차단제는 필수. 맨 피부로 잠시만 햇볕에 노출돼도 벌겋게 된다. 동양인은 스노클링이나 수영을 할 때 셔츠를 입은 채 하는 것이 안전하다.
다양한 피지행 여행상품이 나와 있다. 마나리조트, 몬드리키섬, 해넘이 만찬 크루즈 등을 포함하는 4박6일 상품이 159만원, 난디 쉐라톤리조트, 티부아섬, 크루즈 등이 들어있는 4박6일 상품은 149만원이다. 피지의 시골 해안인 워익리조트에서 묵으며 폭포 트레킹과 크루즈를 즐길 수 있는 4박6일 상품은 159만원이다. 피지 전문 루카스여행(02-884-4490) 등에서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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