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지평선]촛불의 미학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지평선]촛불의 미학

입력
2004.03.24 00:00
0 0

황지우의 초기 시 '초로(草露)와 같이'는 날카롭고 아름답다. <오 환생을 꿈꾸며 새로 태어나고 싶은 물소리> 로 시작되는 이 짧은 시는 명징한 이미지들로 짜여 있다. 어느 순간 독자를 세상 너머로 이끌고 가, 이곳과 다른 풍경 속에 내려 놓는다. <…저 타오르는 불 속은 얼마나 고요할까 상(傷)한 촛불을 들고 그대 이슬 속으로 들어가, 곤히, 잠들고 싶다>(끝부분) 그것은 강렬한 환상이지만, 또한 환상을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언어와 의식이 꿈꾸며 도달하고자 하는, 상상력과 자유의 나라다. 물과 불, 풀의 이미지가 빚어내는 또 다른 체험의 세계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문학비평가 바슐라르의 저서 '촛불의 미학'은 꺼지지 않는 불꽃이다. 이 책은 '물의 정신분석'과 함께 그의 물·불·공기·흙 등 4원소론을 얘기한다. 그는 소설가나 몽상가들이 어떤 경우에도 불꽃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온갖 감정을 가져와 불꽃을 설명한다. 온 가슴을 던져 자신을 감동시키고, 그래서 속이는 광경과 영혼을 통하려 하는 것이다.> 불은 물·공기보다 이중적이며, 더 주관적이고 또 더 객관적이다. 불은 좋은 것인 동시에 나쁜 것, 위험한 것이다. 아무 증거도 없이 찬사를 바치게 만드는 불은, 모순된 존재라는 것이다.

■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지금의 장년층은 등잔불, 촛불, 아궁이불, 잉걸불, 쥐불, 들불 같은 모든 불과 친숙하다. 불꽃과 관련된 갖가지 추억은 평생토록 내면에서 따스하게 타오른다. 불꽃에는 추억과 명상적 고요, 자기 정화(淨化)로 통하는 비밀의 문이 숨겨져 있다. 불꽃에는 또한 자기팽창의 욕망과 위험한 야성이 잠재해 있다. 양초 선물은 많이 받지만, 그것을 한낱 장식용처럼 여기는 신세대들이 딱하다. 대부분 불꽃을 오래 응시할 인내심이 없고, 초 타는 냄새를 싫어하는 것이다. 전기는 물론 촛불보다 편리하다. 그러나 전깃불에는 추억이 깃들이기 어렵다.

■ 많은 군중이 운집한 촛불시위가 전국에서 열흘 넘게 계속되고 있다. 대규모 촛불시위는 재작년 미군 장갑차 사건 때 처음 등장했다. 이번 대통령 탄핵반대 시위로 또 한번 평화적 위력을 보여주고 있다. 나약한 촛불들이 모여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시위방식이 하나의 양식화한 것이다. 당국은 촛불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하면서도 단속을 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 당국도 아름다움과 고요한 정화의 힘을 차마 어쩔 수 없는 까닭이다. 혹은, 바람이 거세지면 순식간에 번지는 불꽃의 야성을 알기 때문이다.

/박래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