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었다 깨어나도 주식은 안 한다" "주식투자를 한다면 도시락 싸들고 말리겠다."유독 우리나라에는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많다. 2000년 벤처 열풍이 가라앉고 주가 거품이 붕괴하면서 적게는 쌈짓돈을, 많게는 전 재산을 날린 개인 투자자들은 '주식'이라면 손을 내젓는다. 개미들에게 주식시장은 샐러리맨의 용돈마저 빨아먹는 '블랙홀'이자 야바위꾼만 설쳐대는 '투전판'이나 다름없다.
코스닥위원회 시장감시실 김현철(43) 주가감시팀장은 증권시장의 물을 흐리는 '꾼'들을 퇴출시켜 조금이나마 시장을 공정하게 꾸려가려는 '주식 경기장'의 심판이다. 증권거래소를 포함해 주가 감시·감리 분야에서만 10년동안 일한 김 팀장은 여의도에서 '저승사자'로 통한다. '실패한 작전'으로 유명한, 2002년 8월 기관투자가 계좌 도용을 통한 259억원대 D통신 주가조작 사건도 김 팀장의 주가감시 덕분에 드러나 '전자인증제 도입'이라는 성과로 연결됐다.
온라인 거래가 이뤄지는 국내 증시에서 김 팀장은 매일 정체불명의 작전꾼들과 머리 싸움을 하며 사이버 공간에서 쫓고 쫓기는 전쟁을 치른다. 김 팀장이 이끄는 11명의 주가감시팀이 찾아내는 불공정거래 사례는 코스닥위원회 감리팀의 감리와 금융감독원 조사를 거쳐 검찰로 넘어가는 만큼 주가감시팀 직원들은 여의도 증권가 현장에 투입된 형사나 다름없다. 잊을만 하면 터지는 온갖 유형의 대형 주가조작 사건과 검찰의 관련자 검거도 알고 보면 매일 주식시세판 모니터를 훑어 내리는 감시팀의 눈초리에서 시작된다.
23일 서울 여의도 코스닥빌딩 13층 주가감시실. 주가감시 분야 경력 2년차인 박지은(25·여)씨의 눈은 책상 앞에 놓인 3대의 모니터를 빠르게 오간다. 박씨는 주식시장 개장(오전 9시) 전인 오전 8시30분 동시호가(특정가격에 매수·매도 주문을 받는 것)때부터 오후 3시 장 마감까지 이상매매 현상을 보이는 종목을 찾아낸다. 박씨는 "과거의 주가흐름이나 시장 상황과 달리 갑자기 주가가 급등락하거나 거래량이 급증하는 종목이 감시대상"이라고 말했다. 이상매매 종목은 코스닥위원회가 자체 개발한 주가감시시스템이 자동으로 찾아낸다. 이날 하루에만 주가·거래량 등 7∼8개 유형별로 10개 종목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박씨의 손놀림은 빠르게 다음 단계로 옮겨간다. 이들 종목과 관련된 각종 뉴스나 풍문 등을 찾아보고 어느 증권사 지점이 가장 많은 주문을 냈는지 모니터를 통해 찾아낸다. 그 결과 이날 추적 대상으로 떠오른 B사 주식 거래량의 20% 정도가 명동의 한 증권사 지점에서 나온 것을 확인한 박씨는 일단 특정 지점 집중관여종목 리스트에 올린 뒤 계좌별 주문상황을 살핀다. 아니나 다를까. 이 종목은 4개 계좌에서 매수 주문이 집중적으로 나왔다. 긴장된 순간이다.
그렇다고 바로 작전이 이뤄졌다 볼 수는 없다. 2∼3일 감시와 추적이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박씨가 가장 주의해 보는 것은 허수성 주문 여부다. 실제 사거나 팔 의도가 없으면서 물량을 쌓아놓았다가 갑자기 이를 취소해 일반투자자들을 현혹시키는 것이다. 허수성 매매가 짙다고 판단되면 해당 증권사 지점에 전화로 사전경고를 한다. 박씨는 "요즘은 은행에서도 계좌 개설이 가능하고 한 사람이 여러 계좌를 개설하는 경우도 많다"며 "허수성 주문은 과거보다 줄어든 반면 여러 계좌에서 주문을 내 단기간에 주가를 올린 뒤 일반인들이 추격 매수하면 물량을 털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큰손들은 서울 사무실 컴퓨터 앞에서 부산 대전 목포 등에 수십개의 계좌를 트고 거래하고 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컴퓨터 IP(인터넷 주소)추적이다. 여러 지점과 계좌에서 주문을 내도 IP를 추적하면 동일인 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 개인 금융계좌 추적은 못하지만 IP를 추적하면 특정종목에 집중 관여하는 투자자는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도둑 잡는 장비나 노하우보다 도둑의 기술이 더 빨리 발전하듯 주식 불공정거래 수법도 갈수록 정교하고 스피드화하고 있다"는게 박씨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대형 주가조작보다는 거래량이 일정하고 재료도 있는 종목을 골라 2∼3일 가량 반짝 주가를 올린 뒤 먹고 튀는 '번개 작전'이 종종 나타나고 있다.
900여개 코스닥 등록 종목을 직원 11명이 분담해 맡다 보니 1명당 업종별로 100여개 종목을 모니터한다. 시세조종이나 불공정거래의 윤곽은 주가감시팀의 감시와 지분관리팀의 '공조'로 이뤄진다. 지분관리팀은 증시 소문을 수집하고 대주주나 임원 등 내부자들의 지분변동을 조사해 주가감시팀에 제공하고, 주가감시팀은 이런 정보와 주가흐름을 접목해 이상한 종목과 관련자를 감리팀에 넘기는 삼각제체가 형성된다. 2003년 한해 동안 주가감시팀이 감리에 넘긴 불공정거래 사례는 145건으로, 이중 혐의가 짙은 92건이 금감원으로 넘겨졌다.
최근 주식시장이 안정되고 호가공개 범위 변경 등 불공정 거래를 막는 제도적 개선이 이뤄지면서 주가조작은 눈에 띄게 감소한 반면 오히려 개인들의 투기적 투자형태는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 주가감시팀 오영탁(37) 과장은 "소위 명동파, 강남파 운운하던 과거 작전 계보들은 대부분 사라졌다"며 "지금도 불공정거래에 편승해 '작전주'를 찾아 대박을 꿈꾸는 개인들의 투자행태가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과거 증권사 직원과 펀드매니저 등이 관련된 전통적 형태의 작전은 감소한 반면 인터넷 동호회나 메신저를 통해 불특정 다수가 연계된 작전이 많아지고 있다.
민경욱(36) 과장은 "작전을 적발하고 보면 인적 연관성이 전혀 없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또 각종 선진 금융기법을 동원하는 등 지능화하고 있는 추세다. 이해균(51) 시장감시실장은 "증권시장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유지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명제"라고 말했다. "개인투자가들이 건전한 수익을 내는 시장이 됐으면 좋겠다"는게 코스닥 주가감시팀의 유일한 소망이다.
/김호섭기자 dream@hk.co.kr
■ 작전세력 유형 변화
예전 한국 증시가 한탕주의를 쫓는 '검은 손'의 장난에 멍들었다면 요즘은 대박을 꿈꾸는 개인들의 '묻지마 투기'로 얼룩지고 있다.
투자자들이 일반적으로 주가조작이라고 표현하는 '주식 불공정거래'에는 시세조종(이른바 작전), 미공개정보를 이용한 내부자거래가 포함된다. 2000년 이후 강화한 시장감시제도 덕택에 불공정거래 적발건수는 2001년 167건, 2002년 156건, 2003년 129건으로 조금씩 감소하고 있다. 하지만 내부자들의 편법·탈법 거래와 더욱 지능화한 작전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과거 증권가 작전세력은 '신뢰와 결속'을 중요시해 대부분 학연·지연으로 연결됐다. 서울대파, 연세대 상대파, 덕수상고파가 대표적이었다. 지역별 큰손들의 집합체인 테헤란팀이나 도곡동팀, 대전 둔산파, 청주파, 전주 큰손, 명동파 등도 이름을 떨쳤다. 덩치가 큰 작전에는 이들을 중심으로 학연·지연으로 연결된 정·관계 고위층과 증권사 애널리스트, 펀드매니저들이 가담했다. 거액을 찔러주면 애널리스트는 주가가 피크에 이른 순간에 매수추천 리포트를 내고 펀드매니저는 자신이 관리하는 펀드에 '모르는 척' 작전주를 집어넣어 추격 매수에 나선 개미와 함께 물량을 받아낸다. 당연히 해당 펀드는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되고 펀드매니저는 "주식시장은 알다가도 모를 곳"이라며 깡통 펀드를 남겨둔 채 잠시 여의도를 떠나 '잠수'했다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보유통이 빨라져 이 같은 거대 작전은 어려워졌다. 대신 하루에도 수십번 주식을 사고파는 '데이트레이더'(초단타 매매자)들이 대거 나타나 특정종목을 집중 매수·매도하며 선량한 개인들을 우롱하고 있다. 이런 꾼들이 아직도 활개치는데는 실적이 좋고 탄탄한 기업에 정석투자를 하기 보다 단 며칠만에 2∼3배의 대박을 터뜨리려는 개인들의 잘못된 투자관행이 자리잡고 있다.
/김호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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