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송파구청앞 지하상가에 자리잡은 '헌책은행', 손님들은 책장을 가득 채운 손때 묻은 책 속에서 읽고싶은 것을 고르느라 눈을 반짝이고 있다. 동화책 코너 앞에 선 유진이(6)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그림책이며 동화책을 넘겨 보는 유진이는 보는 책마다 탐나는지 엄마의 눈치를 살핀다. "좋아, 오늘 기분이다. 다 사줄게." 유진이는 '베토벤 전기'를 비롯해 갖고 싶던 책 5권을 얻었다. 김지영(33)씨는 "헌책 판매 사이트 보다도 몇 배는 싸다"며 1,000원짜리 한 장을 꺼내 들었다.헌책 들고 오면 다른 책으로 교환
송파구는 지난달 23일 헌책을 함께 나누자는 취지로 '헌책은행'의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일반 헌책방처럼 돈으로도 책을 살 수 있다. 책 내용이나 종류, 두께에 관계없이 무조건 권당 200원(백과사전은 500원)으로 저렴하다. 단 하루 5권 이하로 제한돼 있다.
이 곳이 '은행'이라 불리는 이유는 헌책을 들고 오면 돈 대신 다른 헌책으로 교환해주는 독특한 운영방식 때문이다. 책 팔아 용돈 좀 마련하겠다는 생각은 통하지 않는다.
초등학생 아들에게 줄 한자교본을 골랐다는 유중신(50·송파구 송파동)씨는 "헌 책 팔아 받은 돈이야 담뱃값 하고 말 텐데 이렇게 다른 책을 가져가면 얘들한테 선물도 되고 좋다"며 웃었다.
개장 한달만에 단골 고객 생겨
현재 이 곳에 '입금'돼 있는 책은 1만2,000여권. 그 중 상당량이 재건축으로 이주가 한창인 잠실 주공아파트 단지에서 나왔다. 구 관계자는 "주공아파트를 비롯해 구 내 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도서기증함에 넣는 책들이 주요 자산"이라며 "새마을문고나 대형 서점에서도 많은 책을 기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청 직원들은 헌책은행 활성화를 위해 헌책 신고만 들어오면 곧장 달려가 책을 확보한다.
문을 연 지 이제 겨우 한 달이지만 헌책은행은 벌써 단골이 생길 정도로 인기가 상당하다. 지난달 개관 이래 하루 평균 130여명이 은행을 찾고 있으며 불과 10일 만에 판매 7,000여권, 교환 1,000여권의 실적을 올렸다.
헌책 은행 업무를 담당하는 김형주(공익요원)씨는 "주부 노인 어린이 고객이 가장 많고 시골 학교 아이들을 위해 책을 고르는 선생님이나 부대원들에게 선물 하려는 직업 군인도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른다는 장최하(77·경기 광명시) 할아버지는 "매일 수십권씩 들어오는 새로운 책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며칠 전 꼭 사고싶었던 백과사전을 봐뒀는데 다음날 누군가 먼저 가지고 가 허탈했다"고 말했다.
재활용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교육의 장
헌책은행은 책을 기증하거나 교환하면서 아이들에게 자원 재활용의 소중함을 일깨워줄 수 있는 교육의 장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김성호(30·마포구 서교동)씨는 "도서관에 헌 책을 가져가도 오래된 책은 필요 없다며 거절 당한 적이 많다"며 "헌 책을 그냥 버려야 하는 현실에서 내 헌책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고 말했다.
송파구는 헌책은행에서 앞으로 정기 도서교환전과 헌 교복 교환·기증전도 열 계획이다. 문의 (02)410―3324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