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7년 3월22일 프랑스 작곡가 장바티스트 륄리가 파리에서 작고했다. 55세였다. 륄리는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이다. 이탈리아식 이름은 조반니 바티스타 룰리. 가난한 방앗간 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요리사 보조로 소년기를 보냈지만, 프랑스로 이민한 뒤 그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명예와 지위와 부를 얻었다. 그의 프랑스어에는 죽을 때까지 이탈리아어 억양이 짙게 남아 있었지만, 오늘날 륄리라는 이름은 17세기 프랑스 음악을 대표하고 있다.륄리는 다재다능한 예술가였다. 루이14세의 궁정으로 들어갈 기회를 얻은 것은 바이얼리니스트로서였지만, 그는 또한 무용가였고 배우였고 안무가였고 다른 무엇보다도 작곡가였다. 륄리가 안무하고 작곡한 '병든 사랑의 발레'(1657)를 보고 젊은 국왕 루이14세는 저보다 여섯 살 위인 이 명민한 이탈리아인에게 완전히 반했다. 네 해 뒤 국왕은 륄리를 왕실 음악 총감독으로 임명하면서 그에게 프랑스 국적을 주었다. 그 뒤로 륄리의 생애는 탄탄대로였다. 그는 극작가 몰리에르와 협력해 코메디발레를 만들며 파리 사교계의 총아가 되었고, 몰리에르와 갈라선 뒤에는 왕립 음악아카데미 원장으로 임명되면서 프랑스 전역의 오페라 공연에 대한 독점권을 얻었다. 루이14세는 륄리의 예술적 후원자에 그치지 않고 사업적 후원자가 된 것이다. 만년의 륄리는 국왕의 고문으로 일하며 정사에 관여하기까지 했다.
데뷔 초기부터 이탈리아 오페라의 관능성과 장식성에 적대적이었던 륄리는 프랑스어 운율에 걸맞은 레시타티브 체계의 확립을 꾀하고 관현악부와 발레·합창을 중시함으로써 프랑스적 오페라 양식을 확립했다. 한 세기 뒤인 1752년 파리 음악계를 양분했던 이른바 부퐁논쟁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비판하고 프랑스 오페라의 우월성을 주장했던 '애국주의자'들의 우상은 바로 이 이탈리아 출신 음악가였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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