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녕 지음 문학동네 발행·8,800원
윤대녕(42)씨가 네번째 소설집 '누가 걸어간다'를 펴냈다. 5년 만의 창작집 소식이다. 세번째와 네번째 소설집 사이에 그는 장편 네 편을 출간했다. 부지런한 창작 활동이었지만 작가는 "범속한 직업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대중과 직접 부딪쳐야 하는 장편을 쉬지 않고 써왔으니 그런 마음이 들었을 법하다. 그러니까 그에게 새 창작집은 '문학의 시원으로의 회귀'로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윤씨가 경기 일산에서 제주도로 거처를 옮긴 지 1년 째다. 중심에만 있으니 스스로에 대해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몸을 움직임으로써 문학적 반전 효과를 노려야겠다는 '전략'에,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떠났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둥지를 틀고 작업실도 잡았다. 새 소설집에 실린 중·단편 여섯 편 중 네 편이 지난해 한해에 나왔다. "멀리 오니까 집중력이 생기더라. 문학적 긴장감도 유지되고. 글쓰기에 대한 허영심이 없어졌다. 내구력이 붙는다는 생각이 들었다."책 출간을 맞아 서울에 올라온 작가의 말이다.
실제로 글쓰기가 달라졌다. 문체는 여전히 시적이되 소재는 견고하다. 낭만적 기운을 갖고 있되 현실적인 얘기가 많다. 결혼식 날 필리핀으로 떠나버린 신부 이야기 '흑백 텔레비전 꺼짐', 산속 호숫가 호텔에서 며칠을 보낸 뒤 사라져버린 연인 이야기 '무더운 밤의 사라짐'은 그간의 윤대녕 식 글쓰기에 가깝다. 등단 초기부터 계속해온 '실종' 모티프를 어렵지 않게 가려낼 수 있다. 실종 모티프는 그의 작품세계를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평론가 남진우)로 규정한 중요한 계기였다.
그러나 제주도로 옮긴 뒤 쓰여진 작품은 대개 보이고 만져지는 삶 때문에 아파하면서도 그 삶을 계속 살아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표제작 '누가 걸어간다'가 그렇다. 임진강변 시골마을에서 이혼한 남자와 독신 여자가 만났다. 남자는 이혼 충격과 위암 진단에, 여자는 첩의 딸이라는 출생신분에 붙들려 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상처를 나누지만 서로에게 치유가 될 수 없다. 또다른 남녀가 있다. 시골 미장원 여자와 탈영병 남자는 사랑을 나누면서 서울에서 함께 살자고 몇 번이나 약속한다. 그 약속은 지켜질 수 없다. 탈영병이 군인들의 추격을 받게 됐기 때문이다. '출구가 없는 인생'(평론가 이남호)이지만 그 인생을 계속 걸어나간다. "작가이기보다는 사람이기가 더욱 힘겨웠다. 나이를 먹으면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데 대해 담담하고 편안해졌다"는 것이 윤씨가 얻은 사람살이의 진실이다.
그 깨달음을 갖고 그는 단편 '찔레꽃 기념관'에서 '소설가로 산다는 것'의 어려움을 매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한달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나 당신들 삶이 어떤지는 대충 알아. 기초생계비 챙기기도 힘들지? 공과금 때문에 월말만 되면 다들 죽을 상들 하고 다니더군. 그래도 술담배는 못 끊데?" 영화사 기획자가 소설가에게 퍼붓는 독설은 오늘날 빈한한 문학의 현실 증명이어서 쓸쓸해진다. '영화든 텔레비전이든 눈으로 즐기는 게 먼저인 세상'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은 안팎으로 힘겨운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도 계속 걸어간다. 그것이 삶이다. 윤씨는 다음 계획으로 "한 인간이 죽어가는 과정을 통해 우주와 시간을 성찰하는 장편소설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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