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해먹겠다고 해도 대통령인데 정말 내쫓으면 안되지. 솔직히 나도 맘에 안 드는 면이 많아. 하지만 대통령은 대통령이여. 그리고 쫓아낸 한나라당, 민주당도 지들은 깨끗한가? 돈이나 쳐먹고 말이지. 똑같은 놈들이여.""노무현이 대통령 돼서 좋은 게 뭐가 있어? 경제가 좋기를 해 아니면 나라가 조용해? 봐 고건이 맡으니까 오히려 나라가 조용하잖아. 이럴 거면 그냥 그 사람 대통령 시켜도 되겠어."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지 1주일이 지난 19일 오후 서울 종로 탑골공원. 한쪽 구석에서 햇볕을 쬐며 담배를 피고 있던 노인들은 누군가 탄핵 얘기를 꺼내자, 침을 튀겨가며 한참동안 입씨름을 벌였다. 박일규(68)씨는 "대통령이 된 지 1년밖에 안됐는데 야당이란 사람들이 사사건건 발목만 잡더니 이게 말이나 되느냐"며 "총선에서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울화통을 터뜨렸다. 이에 정모(71) 할아버지는 마뜩찮은 듯, "이번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잘 안되면 대통령은 또 '야당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고 말하지 않겠느냐"며 "그럴 거면 아예 싹쓸이를 해서 독재를 하라고 그래"라고 되받았다.
이번 총선의 최대 격전지이자 여야의 전략적 요충지인 서울. 탄핵안 가결 전만 해도 각 당의 혼전 양상이 뚜렷했던 이 곳 역시 탄핵의 역풍이 거세게 몰아치는 지역이다. '대통령 탄핵=정국 불안'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쏟아지고 있고, 그만큼 야권을 비난하는 민심의 파고도 거세다. 서울역에서 만난 회사원 박상규(36)씨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분명히 잘못했고 명분도 없다"면서 "생전 처음 촛불 시위에 참가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대합실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주부 김모(34)씨도 "정치는 잘 모르지만 야당이 대통령을 탄핵까지 한 것은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야당을 비판했다.
탄핵 정국 여파로 전체 유권자의 40∼50%를 차지했던 부동층의 변화도 감지된다. 자칭 '무당파'라는 손모(38)씨는 "총선에선 결국 대통령에 대한 동정표가 열린우리당으로 쏠리지 않겠느냐"고 속내를 내비쳤다.
하지만 이 같은 민심이 총선까지 이어질지 속단하긴 이르다. 성신여대 대학원생인 남유라(27)씨는 "탄핵안 가결 후 열린우리당을 찍으려고 했는데 뉴스를 보니 우리당의 선거법 위반도 엄청나게 많더라"면서 "투표 여부를 다시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국 상황에 따라 표심이 다시 돌변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탄핵 정국은 정치에 냉소적이었던 젊은 층까지 정치 한복판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한양대 캠퍼스에서 만난 최모(3년) 군은 "대통령이 모두 잘한 것은 아니지만 탄핵만 놓고 볼 때 누가 봐도 야당의 잘못이 명백하고, 어느 당이 더 더럽고 부패했는지 알면 답은 뻔한 것 아니냐"며 "이번 선거는 부패한 한나라당에 대한 심판이 될 것"이라고 흥분했다. 옆의 한 학생도 "정치에 관심 없던 애들이 탄핵 문제를 거론하는 등 열기가 높다"며 "부재자 투표소 설치 움직임도 활발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관심 없다"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았다. 서울대 홍지현(20)양은 "나라가 망하는 상황도 아니라서 (대통령 탄핵을) 걱정보다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받아들이는 애들이 많다"고 전했다.
탄핵안 가결 후 여야 대립 구도 때문인지 야권 지지층이 결속하는 기류도 감지된다. 김모(48·식당업)씨는 "이번 사태는 대통령 책임이 더 큰 것 아니냐"면서 "대통령이 너무 싸움을 하려는 기질이 강하다"고 혀를 찼다. 한나라당 지지의사를 밝힌 이모(52·서울 잠원동)씨도 "일부 언론이 편파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지만 일시적인 현상으로, 전통적 지지층이 냉정을 되찾으면 곧 한나라당 지지도가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탄핵 정국을 둘러싼 여야 행태에 신물을 느껴 아예 '투표 포기'를 선언한 이들도 적지 않다. 박나영(32·서울 응봉동)씨는 "양쪽 다 짜증나게 해 투표 자체를 거부할 생각"이라며 "탄핵안은 야당이 주도했지만, 씨는 노 대통령이 뿌린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인천·경기는 여야간 박빙의 승부가 점쳐졌던 곳. 그러나 탄핵 여파는 이 곳에서도 만만치 않다. 18일 오후 인천지역 최대 아파트 밀집지역인 연수구 연수지구 앞 상가. 한참 수다를 떨던 40대 아주머니들이 돌연 총선 얘기가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목청을 돋운다. 주부 김모(43·연수구 동춘동)씨는 "경제는 불안하고 민생은 파탄지경인데 야당 의원들은 나라를 파국으로 내몰고 있다"며 여권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 30대 주부가 "가계 살림은 계속 빠듯해지는데 이를 외면한 채 탄핵정국을 조장한 야당 정치인들은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거대 야당의 횡포에 울화가 치밀어 등을 돌렸다"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경기 수원 팔당시장에서 순대를 파는 고숙자(52)씨는 "어쨌든 대통령은 국부(國父)이고 집안 어른이 아니냐"면서 "대선 때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찍었는데 이번에는 우리 집안 모두 열린우리당을 찍을 것"이라고 말했다.
의정부에서 표밭을 다지고 있는 한 야당 후보측은 "이제는 선거 전략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됐다"고 한숨만 푹푹 쉬었다. 반면 열린우리당 후보측은 "그저 역풍이 불지 않도록 자중하고 있다"면서 표정 관리에 바빴다.
그러나 "야당이 환골탈태할 경우 지지하겠다"는 의견도 제법 많았다. 경기 김포에서 만난 전모(54·농업)씨는 "탄핵은 대통령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면서 "젊은 친구들이 거리로 나와서 너무 요란을 떠는 것도 보기에 안 좋다"고 꼬집었다. 수원 팔달에 사는 임종호(55)씨는 "깨끗하다고 대통령 시켜줬더니 1년도 안돼 줄줄이 비리가 나오지 않았느냐"면서 "특히 자기를 만들어준 당을 배신하는 것은 용납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의 총선 승리를 위한 승부수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오히려 반감이 생긴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상당수 시민은 지지정당을 떠나서 "이제는 국민을 위한 정치를 펴는 국회의원들을 보고 싶다"며 "17대 총선을 통해 국민의 심판을 두려워할 줄 아는 국회의원들이 탄생돼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박정철기자 parkjc@hk.co.kr
홍석우기자 musehong@hk.co.kr
■ 탄핵가결후 수도권 표심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수도권 표심이 요동치고 있다. 탄핵 의결을 주도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거센 역풍에 휘말려 정당 지지도가 하락한 반면 열린우리당은 두 야당보다 각각 3∼6배 높은 정당 지지율을 보이며 순풍을 타고 있다. 17대 총선에서 서울(48)·인천(12)·경기(49) 등 수도권 지역구는 전체 지역구 243석 중 109석. 이 같은 우리당의 수도권 우세가 총선까지 지속되면 우리당은 원내 1당이 될 수도 있다.
우리당은 작년 말까지만 해도 수도권에서 정당 지지도가 12∼13%대로, 한나라당과 민주당(서울 지역)에 뒤졌었다. 그러나 전당대회를 치른 1월 이후 계속 우위를 점하고 있다. 특히 2월 여론조사와 비교할 때 탄핵안 의결 이후 정당 지지도가 무려 10%포인트 이상 올라 탄핵안 가결이 우리당에 대형 호재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한나라당은 지난 해 12월 수도권에서 20∼24%로 정당지지도 선두를 달렸으나 탄핵안 가결 이후에는 14∼17%대로 떨어졌다. 민주당 역시 한 자릿수의 지지도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탄핵안 가결 후 부동층이 작년 말에 비해 최고 10%포인트 가량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부동층 일부가 우리당에 흡수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정당 지지율이 의석 수로 곧장 이어질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급변하는 정치 상황과 후보들의 경쟁력, 연령별 투표율 등에 따라 차이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2000년 16대 총선에선 당시 여당인 민주당이 서울 인천 경기에서 모두 56석(28·6·22석)을 차지, 40석(17·5·18석)을 확보하는 데 그친 한나라당에 판정승을 거뒀다.
/박정철기자 홍석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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