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다 준 글·박종진 옮김, 윤정주 그림 보림출판사 발행·7,500원
요즘 판타지는 현실과 전혀 다른 세계에서 벌어지는 신나는 모험과 동의어가 돼버렸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영향력이 컸고, '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가 주는 이미지 효과가 대단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일본 동화작가 오카다 준의 '신기한 시간표'는 판타지가 되기에는 얼마간 모자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책에는 수다한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 애니메이션이 놓치는 이야기의 미덕이 살아 있다. 상상의 나래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현실을 더욱 풍요롭고 값지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신기한 시간표'는 딴 세상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마술이 아니라 현실에서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이며, 정확히 말해 그 모든 것이 남김 없이 현실이다. '서로 다른 초등학교에서 서로 다른 계절, 서로 다른 시간에 생긴' 10가지 이야기가 끝나고 책을 덮은 뒤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친구들과 말도 안 하고, 화장실 갈 때 아니면 교실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미도리가 오늘 양호실에 건강기록부를 가져다 주어야 한다. 화장실 갈 때처럼 복도의 초록색 타일(미도리는 '초록'이라는 뜻)을 밟고 가던 그의 뒤에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내 몸은 새까맣고 이름은 구로(검정)니까 검정으로 간다." 고양이와 경쟁하며 초록 타일을 밟고 가던 미도리는 계단에서 막혀버린다. 거긴 초록 타일도 검정 타일도 없다. 그때 고양이가 분홍 타일 위로 훌쩍 내려앉으며 말했다. "내 혀는 분홍. 그래서 분홍!" "내 이는 하양, 그러니까 하양"에서 "내 운동화 바닥은 갈색, 그러니까 갈색"까지 등장하며 무사히 양호실을 다녀온다는 이야기 '타일 고양이'에는 내성적인 어린이의 문제 상황 극복법이 슬기롭게 그려져 있다.
교실 마루바닥 아래에서 나온 도마뱀이 준 마법 지우개를 통해 싫은 척하지만 속으로는 친구를 좋아하는 본심을 알게 되는 이야기 '지우개 도마뱀', 조금 모자란 급우 군페이의 장난에 화가 난 료타가 '돌멩이가 되어 버려라'고 빈 직후 군페이가 없어지자 마음 졸이는 사건을 다룬 '돌멩이' 등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쳐 재미있고, 짧지만 훌륭한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 아이들을 흠뻑 빨아들이기에 모자람이 없고 어른도 유쾌하게 읽어가다 책을 덮을 때쯤 아이들의 마음에 성큼 다가가게 만드는 책이다. 아동문학평론가이며 번역가인 김경연씨는 "상상의 세계는 짐짓 눈높이를 맞춘다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마음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고 이 책을 호평했다. 보림출판사가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 어린이들을 위해 준비한 보림문학선 첫 권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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