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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커버스토리/70년대生 시대의 경계에서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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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커버스토리/70년대生 시대의 경계에서 떠돈다

입력
2004.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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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이 시대의 왕따입니다. 겉으로는 무슨 세대, 무슨 세대하면서 주인공인양 더 받들고 모든 매스컴이 문화 흐름의 주역인 것처럼 꾸며 놓고 있지만, 사실은 그대들에게 컴퓨터와 핸드폰을 팔아먹고 카드를 마구 긁게 만들려는 수작들일 뿐입니다.그대들은 거기에 세뇌되어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좋은 세상에 살고 있고, 늙수구래한 아저씨 아줌마들보다 자신들이 훨씬 즐겁고 재미있는 세상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말짱 착각입니다. ” “결국은 잘못된 교육과 당신들의 잘못도 아닌 IMF의 후유증과 진정한 선생님, 현명한 부모님, 진심어린 선배 아래서 자라지 못하고 소비문화의 마약만 투여 받으며 수경재배된 여러분들은 지금 아무도 일자리를 안 준다는 왕따를 당하고 있습니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이태백에게 드리는 글’의 내용이다. 황신혜밴드의 김형태씨가 쓴 이 글은 단지 ‘이태백’이란 청년실업자의 문제만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젊은 세대가 처한 위기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최근 문화이론전문지 ‘문화과학’ 봄 호는 ‘청년 문화의 실종’을 심층적으로 다루면서 ‘소비문화에서 길러져 지출 수준이 높은 젊은 세대가 청년실업자로 고착화할 경우, 사회변혁의 뇌관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 반대편을 볼까. “기성세대와 전혀 다른 열정과 개방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동체의식을 지향하는 신독립세대로, 미래의 창조적 화합을 책임질 새로운 세대로서의 희망을 보였다.” 2002년 월드컵에서 보여준 젊은이들의 모습을 ‘R세대’라고 규정한 한 보고서의 내용이다.

이 양 극단 사이, 바로 그 젊은 세대의 중심에 70년대생들이 있다. 대학시절 신세대, X세대, N세대 등으로 불리며 호강했지만 졸업무렵에는 청년실업난에 꽉 막힌 이들. 핸드폰, 인터넷, 스타벅스, 뮤직비디오, 디카 등 다양한 문화의 세례를 다 받았지만, 실제 그들이 처한 경제 현실은 대부분 취업문 앞에서 헤매거나, 비정규직 시장을 떠돌고 있거나, 아니면 막막한 창업의 대해에서 홀로 항해하는 중이다.

‘높은 문화 수준’이면서 ‘낮은 경제적 현실’이란 괴리는, 때론 지난해 광화문을 휩쓴 촛불 시위의 열정을, 때로 그 반대점에 있는 신용불량자의 무기력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문화적 신주류’라고 치켜 세워지면서도 ‘사회 경제적인 아웃사이더’인 셈.

정말 그들은 기성세대의 소비문화가 길러낸 시대의 왕따일까. 아니면 영상ㆍ디지털 문화의 첫 수혜자로서 우리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새로운 주체일까. 갖가지 수사로 치장되며 한때는 우리사회의 가능성과 잠재력으로, 다른 한때는 사회불안을 낳는 천덕꾸러기로 묘사되어온 그들의 삶과 꿈은 무엇일까. 그들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탄핵 정국’의 소용돌이 저 밑에서, 점차 목소리를 높이며 얼굴을 들이미는 그들을 만나보자.

/사진=김주성기자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70년대生 | 문화예술·정치계

X세대라는, 가능성이 가득찬 수사를 받으며 20대 초반을 보낸 1970년대 출생들. 그들은 영화 문학 정치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참이다.

외계인으로부터 세상을 보호하려는 한 청년의 고군분투를 그린 영화 '지구를 지켜라'로 지난해 모스크바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장준환(34) 감독은 영화계 70년대 세력의 맏형으로 꼽힌다. 1970년생, 89학번인 장 감독의 이 영화는 '경악스럽다' '재기발랄하다' 등 다양한 평가를 받으며 두터운 마니아 층을 형성했다.

71년생 장진 감독(33)은 '기막힌 사내들' '간첩 리철진' '킬러들의 수다' 등 감성과 재치를 조화시킨 영화를 꾸준히 발표하며 인기를 끌었다. 2000년 엽기코드의 시초로 일컬어지는 단편 영화 '다찌마와 리'를 만든 류승완(31) 감독은 같은 해 선보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2002년 '피도 눈물도 없이'를 만들어내며 주목받는 젊은 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여고괴담' 세 번째 시리즈를 만든 윤재연(여·31) 감독과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로 스크린 신고식을 치룬 용이(30) 감독도 70년대생이다.

문학작가 중에서 또래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지난해 월간 '문학사상' 8월호는 '내겐 너무 잔인했던 그 여름'이라는 제목으로 김종은(30) 정이현(32) 권정현(34) 듀나(나이 미상) 한차현(34) 김문숙(33) 김도언(32) 오현종(31) 백가흠(30) 등 70년대생 신예 작가 아홉 명의 엽편(葉片)소설(원고지 4∼20매 분량의 짧은 소설)을 특집으로 실었다. 문학계가 이제 슬슬 '386세대' 작가를 넘어 70년대생 작가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90년대 후반 들어 이른바 '신세대 문학'이라는 용어를 탄생시키며 출현한 70년대 작가들은 한국문학에 큰 물줄기를 형성한다. "내 다음 세대들은 이제, 그 멍청한 리버풀의 네 애송이들인 비틀스나 다 늙어 쪼글쪼글해진 레드 제플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라고 외치는 소설가 백민석(33)은 연작 소설 '16 믿거나 말거나 박물지', 장편 '내가 사랑한 캔디' 등으로 독특한 '신세대적' 작가 세계를 드러내는 이로 꼽힌다. 젊은 작가면서도 전통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한강(34), 소설은 물론 영화·가요 평론 등 전방위로 활동하는 김연수(34)도 주목할만한 작가다.

아직 많지는 않지만 이번 총선부터는 70년대생 후보들이 속속 나설 전망이다. 현재 출마자 중 최연소자는 72년생인 하귀남(32) 변호사. 마산 회원 선거구 열린우리당 경선에서 이겨 후보에 올랐다. 71년생이면서 단편 소설집 '엘리베이터', 장편소설 '테러리스트' 등으로 이름을 날린 송경아(여·33)씨는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로 나섰다.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70년대生|X세대에서 "이태백" 세대까지

"이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네트워크를 구축해 하나로 결집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으며, 자유롭고 창의적인 의식과 행동으로 기존의 관습과 관념에서 탈피해 새로운 사회 변화를 이끌고 있다." (제일기획 보고서, 'p세대를 찾아서' 중)

"하고 싶은 일이 없고 확실하게 할 줄 아는 것이 없고, 겁은 많아서 실패는 무진장 두려워하고, 무엇이든 보상이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으면 절대 시작도 하지 않으며, 눈은 높아서 자기가 하는 일도 주변의 현실들도 모두 못 마땅하고 시시껄렁하고, 옛날 사람들처럼 고생고생하면서 자수 성가하는 것은 할 자신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고, 어떡하면 편하고 안정된 직장을 얻어 돈을 벌 수 있을까만 궁리합니다."(황신혜 밴드의 김형태씨, '이태백에 드리는 글' 중)

'사회변화의 신주류', '무기력한 방종의 집단'.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두 표현이 뜻하지 않게도 똑 같은 세대를 향하고 있다. 지금 우리의 젊은 세대, 그러니까 때로 'P세대'로, 때로 '청년실업세대'로 불리는 그들. 그 중심에 놓인 이들이 바로 1970년대생들이다. 만 25살에서 34살까지. 한때 자유분방한 X세대로 불리며 주목받았지만 대학졸업 무렵 IMF 환란위기를 맞아 졸지에 천덕꾸러기가 됐다. 지금도 태반이 취업문앞에 서성이고 있어 '이태백'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때로 '2030세대'로 불리는 이들은 산업화세대와 386세대의 뒤를 잇고 있지만, 그 정체성은 여전히 안개속을 배회한다. 사회변화를 이끄는 '활력'과 실업상황의 '무기력'이라는상극의 정서가, 아무렇지도 않게 교차하는 세대들이다.

청년실업 책임공방

이 세대의 최대 화두는 익히 알다시피 실업난이다. 올 1월 통계청의 고용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25∼34살까지의 실업자는 전체 실업자중 85만4,000명중 28만4,000명으로 33.2%를 차지, 세대별로 따져서 최대의 '백수부대'로 등장했다. 실업난의 정도도 갈수록 나빠져 이 세대의 실업자가 2001년 25만7,000명, 2002년 27만2,000명으로 해마다 1만여명 이상씩 증가했다.

청년 실업난은 70년대생들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인 98년 초, 그러니까 IMF후유증이 본격화할 때 시작됐다. 98년 당시 20대 실업자가 56만여명에 달한 데 비해 다소 수그러들었지만, 비정규직이 늘면서 취업의 질은 더욱 악화한 상태.

이 와중에서 최근 때아닌 '책임 공방' 논란이 불거졌다. 황신혜 밴드의 김형태씨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취업 고민을 상담해온 한 '이태백'에게대답하는 글에서 '청년실업 문제에 대해 사회에 불평할 게 아니라, 도전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자신을 탓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한 것. 사회와 경제구조는 빠르게 변화해가는데, 지금 젊은 세대들은 능력도 없으면서 겉 멋이나 부리고 편한 일을 찾을 궁리만 한다는 혹독한 채찍질이었다. 그는 "취업문이 좁다고 하지만, 모든 회사에서는 인재가 없다고 난리"라며 "(일부)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개성도 없고 창의력도 없고, 일에 대한 열정도 없다"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젊은이들의 나약한세태를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진솔한 글을 읽고 무척 반성했다"는 의견 한편으로"기성세대의 잘못을 우리가 짊어졌다"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없다"는 치열한 항변이 오갔다. 심지어 "아예 사회적으로'건너뛰는' 세대"라는 말까지 나왔다.

극과 극을 오간 세대 경험

그러나 불과 1, 2년여 전으로 돌아가보면 이 세대에 대한 상찬은 극에 달했다. 특히 월드컵과 대선, 광화문 촛불시위 등을 거치면서 '열정(power)과 힘(power)을 바탕으로 사회 패러다임의 변화를 일으키는 세대(paradigm-shifter)', 즉 P세대란 영광스런 칭호를 얻었고, 우리사회의 신주류이자 소비주체로 떠오른 '2030'세대로도 불렸다.

극과 극의 평가는 비단 이번 만은 아니었다. 'X세대'에서 'IMF세대'까지. 그들이 겪어온 시대 자체가 극과 극의 상황이었다. 1970년대생들이 대학생활에 맛들인 90년대는 국민소득 1만달러를 넘는 경제적 성장을 구가했고, 대학은 영상 및 소비문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상황. 이데올로기는 퇴조했고, '나는 나'라는 슬로건 아래 자유로운 대학문화가 만개했다. 개성 넘치는 '신세대'라는 부러움을 일거에 받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그들은 디지털문명의 총아로 대접받았다. 계층에 따라서 형성된 복잡한 문화적 지형 속에서 'N세대' '모바일 세대' '명품족' '코쿤족' 등 다양한 세대군와 '족'들도 탄생했다. 화려한 젊음을 구가하는 듯했지만, IMF 사태는 이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던졌다. 이후 줄곧 계속된 취업난. 'IMF 세대' '청년실업 세대' '상실세대' '불운의 세대' 라는 낙인이 찍혔다. 수유연구실의 고병권 연구원은 "70년대생은 현실과 문화가 갈라서버린 분열의 세대"라며 "그래서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수의 이름을 가졌다"고 말했다.

청년 실업난 속 첫 개척세대

다양한 문화 속에서 길러진 창의적이고 개성 넘치는 성향도 결국 치열한 취업 현실의 냉정한 벽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창의성은 허황으로, 자유분방함은 무책임으로 돌변했다. 하지만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상황이 바뀌면 또 상찬받을 성향인 것.

결국 관건은 취업난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있다. 대학시절 게임에 빠졌다가 졸업후에도 게임업체에서 일하게 됐다는 정희찬(30)씨는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자발적인 문화를 만든 첫 세대"라며 "변화하는 사회구조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것이 우리의 최대 밑천일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사회구조가 고도화할수록 '고용없는 성장'이 고착되고 청년실업난도 그만큼 어려워진다. 70년대생은 앞으로 계속될 고질적인 실업난 속에서 스스로 자기 길을 걸어간 첫 세대로 기록될 것이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70년대生의 이름들

신세대 : 한국일보사가 1988년부터 89년까지 연재한 '신세대 시리즈'에서 처음 사용. 탈권위주의, 높은 정치의식, 통일운동, 시각문화 선호, 새로운 소비문화 등을 특징으로 했지만 90년대 들어서면서 정치적 성격은 사라졌다.

X세대 : 더글라스 커플랜드의 소설 '제너레이션 X'에서 비롯된 말. '마땅하게 정의할 수 없다'는 뜻에서 붙여졌음. 93년 광고 카피로 사용되면서 상용화되기 시작.

마지막 운동권 : 90년대초 대학내 운동권이 퇴조하는 가운데서도 마지막까지 80년대적 가치를 추구한 이들. 대학내 운동권은 96년 연대사태를 기점으로 거의 소멸했다.

오렌지족 : 90년대초 일부 특수층 신세대. 카페-당구장-로바다야키-나이트 클럽-호텔로 이어지는 풀코스 데이트 신청과 허락을 오렌지를 주고 받는 것으로 표시한 풍조에서 비롯된 말이다.

N세대 : 1990년대 후반 인터넷 문화가 본격화하면서 등장한 말. 네트워크 세대란 뜻이다. 디지털 테크놀러지를 일상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에서 형성하는 세대.

IMF 세대 : 1997년 IMF 사태 여파로 심화된 청년 실업난을 겪은 세대. .

P세대 : 2002년 월드컵, 촛불시위 등을 통해 나타난 참여성이 강한 젊은 세대를 지칭. 핵심 키워드는 도전, 개인, 네트워크, 감성, 경험. 월드컵 세대의 'W세대'나 당시 붉은 색 티셔츠 물결을 상징한 'R세대'라고도 불린다.

노마드족 : 유목민이란 뜻.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사회에서 한 직장에 정착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와 취향에 따라 끊임없이 옮겨다니는 이들을 말함.

코쿤족 : '누에고치'란 말에서 유래한 용어. 외부 세상에서 도피해 자신만의 공간에 머물러 사는 '나홀로족'을 말한다. 안정된 수입원을 갖고 있으면서 홀로 디지털 문화를 세련되게 향유하는 부류다.

폐인족 : 식음을 전폐하고 사이버 공간에서 떠도는 백수를 지칭한 말로 사용됐으나, 최근에는 한 현상에 흠뻑 빠진 '마니아'를 부르는 말로도 사용된다.

보보스족 : 부르주아의 물질적 풍요와 보헤미안의 정신적 풍요를 동시에 누리는

디지털 시대의 상류 엘리트.

■70년대生|그들 인생의 5막 11장

1950년대에 태어난 산업화 세대, 60년대에 태어난 386 세대는 뚜렷한 이념적 지향과 사회적 역할로 구분된다.

그러면 새롭게 사회의 중심으로 편입된 70년대생들, 즉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의 연령층을 관통하는 공통분모를 뭘까. 그들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총칼로 득세한 5공정권에서 보냈다. 그들에게 80년대는 '민주투쟁의시대'가 아니라 이른바 '3S(Sport, Screen, Sex)의 시대'였다. 그 한편엔 입시지옥이 있었다.

90년대 대학에 들어섰을 때는 사회참여 기류가 퇴조하고 개인주의와 소비문화, 인터넷 문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무렵이었다. 'X세대'란 신조어도 이즈음에 나왔다. 새로운 집단문화의 방향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는 사이에 불현듯 'IMF 시대'가 찾아왔고 미처 준비할 사이도 없이 그들은 냉혹한 취업전선에 내던져졌다.

70년대 중반생들이 특히 그 변화기의 중심에 있었다. 그들은 한발 늦었거나, 혹은 한발 앞서 왔는지 모른다. 70년대생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연대기를 구성했다. 그들은 이렇게 살아왔고, 지금 딱 그 만큼 여기 와 있다.

1막, 유년기 - 70년대말 80년대 초

1장―아스팔트 틈새에서 놀다.

유년기의 첫 추억은 아스팔트길 동네 골목. 비좁은 골목에서 술래잡기와 딱지치기로 해지는 줄 몰랐다. 딱지에 이용되던 종이엔 간혹 '선데이 서울'도 끼어있었다. 한때 아버지가 "어른이 돌아가셨다. 이제 이 나라가 어디로 갈지…"라며 걱정을 털어놓아 덩달아 슬퍼졌다.

2장―놀 일이 많아졌다

'왜 이렇게 놀게 많아졌지?' 1년이 멀다하고 프로야구, 농구대잔치, 프로축구가 잇달아 개막했다. 일년 내내 스포츠만 봐도 좋았다. 프로야구가 최고 인기였다. 딱지치기는 이제 시시해졌다. 야구 방망이와 글러브로 뛰어놀았다.

나가면 야구, 들어오면 컬러 TV였다. 오락실도 많이 생겼다. 엄마 몰래 오락실에 가 '스트리트 파이터'에 흠뻑 빠졌다. 집에서도 오락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컴퓨터였다. 물론 부자집 아이를 구슬려야 구경할 수 있었다. 한번 부팅하려면 20분 이상 걸렸지만, 컴퓨터는 신기한 요술단지였다.

2막, 중학교 - 80년대 중·후반

3장―최루 가스를 마시다

거리에선 연일 데모가 이어졌다. 최루탄 때문에 수업을 못 할 때가 많아 좋았다. 하지만 왜 데모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빨갱이들이 사주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학생 형이나 누나를 둔 친구들은 간혹 이상한 말을 했지만, 사회를 혼란시키는 빨갱이들이 미웠다.

4장―스크린에서 넋을 잃고, 성(性)을 배우다

어느날 찾게 된 극장, 할리우드 영화 '빽투더퓨처'는 경이로움과 신비함 그 자체였다. 마술 같은 장면이 현실로 펼쳐졌다. 환상적인 꿈의 신대륙이었다. 넋 놓고 길 잃을 수 밖에. '영웅본색' '천녀유혼' '지존무상' 등 홍콩 느와르 영화도 최고 인기였다. 주윤발, 장국영, 왕조현은 시대의 우상이었다. 만화방에서 보던 비디오도 집집마다 장만됐다. 비디오는 아슬한 '금단의 열매'였다. 부모님 몰래 '빨간 딱지'의 비디오를 몰래 훔쳐보는 것은 그 시절만의 스릴이었다. 삼류극장의 '에로영화'는 조숙한 아이들에겐 또다른 세계를 보여줬다. '무릎과무릎사이' '어우동', '매춘' 시리즈는 희뿌연 어른 세계를 슬쩍 엿볼 수 있는 창이었다.

3막, 고등학교 - 80년대말 90년대초

5장―입시 지옥에 들어서다

인생의 암흑기. 학교는 살벌했다. 밤 10시가 넘도록 학교에 묶여있었다. '잠은 무덤에서 자도 충분하다'는 말을 못이 박히게 들었다. 대입제도도 수시로 바뀌었다. 바뀐 수능에서도 주입식 교육은 여전했다. 공부 못하면 죽도록 맞았다. 하루에 60대까지 맞은 적도 있었다.

6장―서태지에게서 해방과 자유를 느끼다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야자 시간에 몰래 빠져나와 분식집에서 듣던 서태지. '교실 이데아'는 답답한 마음을 깨뜨리는 통쾌한 망치였다. 자유와 해방의 의미를, 머리 보다 몸이 먼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교실로 돌아가면 어김없이 선생님의 회초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4막, 대학교 - 90년대 중후반

7장―전설이 된 운동권. 선배는 말이 없었다

운동권은 이미 전설이 되고 있었다. 그 대망의 종지부를 96년 '연대사태'가 찍었다. 마지막 운동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시생으로 돌변했다. 취직도 잘 됐다. 개중엔 안기부에 취직하는 선배도 있었다. 안기부 경쟁률은 해가 갈수록 높아졌다.

학부제가 도입되면서 선후배 관계도 거의 없어졌다. '사회참여'니'연대'라는 말도 박제어가 됐다. 대학에선 홀로 된다는 것을 배워야했다.

8장―PC 통신, 꿈을 좇는 동호회

대학은 평온한 것 같았지만, 알 수 없는 무기력함이 깃들어 있었다. 누구도 무엇을 해야할지 말하지 않았다. 부유한 아이들은 해외여행을 떠나고, 유학을 가기 시작했다. 할 일이 없으면 영어를 배워두는 게 상책이었다.

왕가위의 '중경삼림',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너바나의 음악으로 쓸쓸한 마음을 달랬다. 가장 가까운 친구는 바로 PC통신 '천리안'과 '하이텔'. 서서히 보급되기 시작한 386 컴퓨터 앞에서 낯선 타인을 만났다. 옆의 친구보다 이름 모를 타인에게 더 진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로 번개로 '폭탄'을 맞기도 했다. PC 통신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영화, 그림, 음악 등에 관한 동호회를 만들어 갔다.

9장―시대의 낙오자, IMF 시대

군대는 시대의 낙오자를 만드는 것 같았다. 갈수록 대학은 급변했다. 군대 갔다 온 뒤 PC 통신은 이미 망해 가고 없었다. 느려 터졌던 인터넷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졌다. 모든 길은 인터넷으로 통하고 있었다. 당구장이 사라진 자리엔 PC방이 들어섰다.

가장 큰 변화는 IMF 시대였다. 졸업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갑자기 '빨간불'이 켜졌다. 취업문은 굳게 닫혔다. 대기업은 아예 포기해야했다. 후배들은 1학년 때부터 고시 공부에 돌입했다. 그들의 머리엔 학점과 돈 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5막, 졸업 후 - 2000년대 초

10장―문 앞에서 서성이다

해가 바뀌어도 취업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고시에 인생을 거는 친구들이 늘어났다. 눈높이는 9급 공무원 시험까지 내려갔다. 벤처 열풍이 불 때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듯 했다. 하지만 벤처 거품이 거치자 모두 또 실직자가 됐다. 수시로 직장을 옮겨 다녀야했다. 아르바이트 서너 개로 생계를 유지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11장―꿈을 좇다

차라리 내 꿈을 좇아가자. 친구끼리 모여 창업의 길을 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직장이지만, 밤엔 학원을 꾸준히 다니며 꿈을 잃지 않았다. 그래도 미래는 있기 때문이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인터뷰 | 플래시 애니메이션社 "아이스덕" 70년대生들

"'불운한 세대'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진 세대라고 생각해요"

플래시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아이스덕'의 직원 7명은 모두 70년대생들이다. 71년생에서 77년생까지. 비슷한 시대를 겪어온 만큼 직원들 사이엔 위아래가 따로 없다. 잠옷만 아니면 어떤 복장도 허용된다고 하니 평소 분위기도 짐작케 한다. 대표 신윤미(31)씨의 얼굴에는 활기가 넘쳐 흐른다. "고생도 많이 했지만 이제는 비전이 보이는 것 같고, 정말 잘 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요."

인하대 미술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2001년 플래시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창업했지만, 그 역시 한해 8,000여개의 IT 업체들이 도산하는 벤처 불황의 태풍을 비켜가진 못했다. 경영이 어려움을 겪자 지난해 직원들이 대부분 떠나 2명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올 1월 대학 동아리 후배였던 박수철(27), 김대의 (29), 표양일(27)씨 등이 새로 합류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전공은 제각각이지만 그림과 컴퓨터라는 관심분야는 비슷했다. 의기투합한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며 밤을 새운 날은 헤아릴 수 없다. 지성이면 감천인가.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한국문화컨텐츠진흥원의 입주사 선정에 낸 사업계획서가 당선된 것. 드디어 올 2월말 서울 목동의 진흥원에 입주했고, 문화관광부의 지원금도 받게 됐다.

이제 막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지만, 신 대표는 "온라인어린이 교육사업 아이템을 기획했는데, 해외에도 없는 독창적인 사업"이라며 "매출 100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10억원이 될지 100억원이 될지 알 수 없지만, 그 호기는 하늘을 찌른다.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그림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박수철씨는 "어쩌면 한푼도 못 벌지도 모르지만 맘에 들지 않는 직장에 취업해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느니, 내 꿈을 만드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김대의씨나 표양일씨도 마찬가지. 이들은 거친 풍랑 속에서 같은 배를 타고 가는 동반자들이다.

이들에게 70년대생이란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를 흔히 '낀 세대'라고 말 하지만, 거꾸로 보면 그만큼 우리는 위와 아래의 다양한 문화를 흡수한 게 아닐까요. 우리는 성숙한 상황에서 다양한 문화적 세례를 받았지만, 80년대생들은 너무 어린 나이에 여러 문화충격을 받으면서 무분별해진 경향도 있죠"(박수철) "어려운 상황이지만, 마음만 있다면 길은 넓다고 봐요. 할 일도 많고. 영상 인터넷 문화 속에서 커왔기 때문에 우리 나이 또래가 더욱 인터넷 문화를 발전시켜 나갈 거예요."(신윤미)

/송용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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