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알아서 해준다는데 왜 자꾸 전화를 해요."A은행 채권관리 담당 직원인 C씨는 최근 400만원의 대출금을 연체하고 몇 개월째 한 푼도 갚지 않은 P(여)씨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되려 면박만 들었다. "5월이면 배드뱅크에서 빚을 탕감받을 수 있는데 그 쪽에서 해결하면 되지 않느냐"는 게 P씨 주장의 요지. C씨는 "배드뱅크 대상이 안 될 수도 있고 어차피 빚은 갚아야 한다"고 설득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최근 배드뱅크 등 신용불량자 구제 대책이 쏟아지면서 "5월까지만 버티자"는 연체자들이 속출하고 있어 금융권이 골치를 앓고 있다.
18일 금융권에 따르면 P씨의 경우는 가장 적극적인 '배짱형'이다. B은행 가계여신 담당자는 "'개인 워크아웃이나 배드뱅크로 갈 테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고객이 늘고 있다"며 "어떤 고객은 '어차피 정부에서 채무자한테 유리하게 해주는데 빨리 갚을 필요 있느냐'는 해석까지 곁들인다"고 혀를 찼다.
이런 저런 핑계로 변제를 미뤄 채권자의 진을 빼는 '시간벌기형'도 있다. C카드사 관계자는 "'5월에 배드뱅크로 갈 테니 그 때까지만 참아달라'고 부탁한 고객이 있었다"며 "사실상 우리 회사에는 돈을 갚지 않겠다는 말 아니냐"고 허탈해했다. D은행 관계자도 "이자는 꼬박꼬박 갚다가 갑자기 이자 변제도 않는 고객이 늘어났다"며 "의도가 명백하지만 '월급이 안 나왔다' '결제 대금을 못 받았다'고 사정해 더 따지기도 어렵다"고 전했다.
배드뱅크에 대한 문의 명목으로 채권자의 반응을 살피는 '탐색형'도 있다. D카드 관계자는 "'내가 배드뱅크의 대상이 되겠느냐', '배드뱅크에 가면 정말 원금 탕감이 되느냐'는 등의 질문이 쇄도하고 있다"며 "상담원들의 평균 상담시간이 두 배 이상 늘어났을 정도"라고 전했다. 18일 개통된 '배드뱅크 설립지원 콜센터'에도 아침부터 문의 전화가 빗발쳐 연결조차 힘들 정도다.
인터넷에서도 이런 경향이 쉽게 감지된다. 한 대형 포털사이트의 100여개 신용불량자 관련 카페에는 "배드뱅크로 갈 경우 어떤 혜택을 볼 수 있느냐"는 현실적인 질문들이 쇄도하고 있다. 반면, "고금리를 물며 대환대출로 전환한 사람만 손해 아니냐" "공무원이 되려고 안간힘을 써서 신용을 유지했는데 너무 불공평하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적지 않은 상태다.
한 은행 관계자는 "3월10일 기준 6개월 이상 연체라는 배드뱅크 기본 조건도 모른 채 '1개월 연체자인데 5개월 더 연체를 시켜야 하느냐'고 문의해 오는 고객을 보면 딱할 정도"라며 "신불자를 줄이려고 만든 배드뱅크가 도덕적 해이의 증대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것 같아 우려된다"고 말했다.
/박진석기자 jse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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