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3월19일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가 북으로 송환됐다. 비전향 장기수란 사상 전향을 거부한 채 장기간 복역한 인민군 포로나 남파 공작원을 가리킨다. 이들은 1960년 전후로 풀려났다가 1975년 사회안전법이 제정되면서 보안감호 처분으로 재수감돼 무려 30∼40년씩 옥살이를 했다. 보안감호 처분이 이중처벌이라는 점, 전향 제도가 양심의 자유를 부정하고 있다는 점, 이들의 옥살이 기간이 전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길었다는 점 때문에 비전향 장기수는 한국 인권 상황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만했다.1917년 함남 풍산군에서 태어난 이인모씨는 소년시절부터 항일운동에 뛰어들었고, 1950년 6·25 발발 후 인민군 문화부 소속 종군기자로 낙동강 전선까지 남하했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본대와 연락이 끊긴 뒤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경남도당 선전부장 대리로 있으며 '경남도당 신문'을 만들다가 1952년 지리산 대성골에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징역 7년을 선고 받고 1959년 1월 만기 출소했으나 두 해 뒤 5·16 군사정변 직후 다시 구속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5년 형을 선고 받았고, 1976년 만기를 넘겼지만 사회안전법에 의해 보안감호 처분을 받아 1988년 10월까지 갇혀 있었다. 34년간 옥살이를 한 것이다.
1991년 9월 북의 아내 김순임씨가 이인모씨에게 보낸 애절한 편지는 '말'지 그 해 11월호에 실려 사람들의 눈물샘을 건드리며 장기수 송환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국내 보수세력의 반발 속에서 김영삼 정부는 이인모씨를 송환하는 결단을 내렸고, 갇혀 있던 비전향 장기수들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인 1999년 말까지 모두 출소했다. 김대중 정부는 남북정상회담 뒤인 2000년 9월2일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북으로 돌려보내 이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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