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한국 스포츠 50년]184연승 신화 쌓은 "한의사 배구인"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한국 스포츠 50년]184연승 신화 쌓은 "한의사 배구인"

입력
2004.03.18 00:00
0 0

동양의약대학 한의대(경희대 한의대 전신) 시절 배구를 하면서도 학구파로 통했던 그는 68년 국세청 코치로 가기 전 3년간 한남동에서 직접 한의원을 운영했고, 감독을 하면서 자기 팀 뿐 아니라 국제대회에 참가한 일본 등 외국의 부상 선수들까지 치료해 세계 배구계에서는 유명한 '닥터'. 국내에도 얼굴이 널리 알려진 덕분에 한의사협회의 대외업무를 책임지게 됐다.'우승 제조기'로 불리며 대농의 184연승 신화를 세우고, 운동 지도자로서는 처음 재벌기업 임원이 돼 상무까지 올랐던 그는 95년 팀 해체 후 효성으로 옮겼다가 97년 벤치를 완전 떠났지만 잠시도 코트를 잊지 못하는 영원한 배구인. 현재도 실업연맹 부회장과 대한배구협회 상벌위원을 맡고 있다.

그는 김호철 현대캐피탈 감독의 국내 복귀가 침체한 배구를 회생시키는데 폭발적인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코트에는 연승기록과 라이벌의 존재가 절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요즘 80연승을 눈앞에 둔 삼성화재의 신치용감독을 만나면 연승기록에 너무 부담을 갖지 말라고 말하지만 사실 50승, 100승과 같은 목표가 있어야 강 팀도 매 경기 최선을 다 하게 됩니다. 특정 팀이 연승을 하면 재미가 없어진다고 하는데 사실은 80년 대농을 라이벌 현대가 아닌 선경이 잡았듯이 우승을 못하는 팀들에게도 '대신 최강을 잡아 체면을 세워 보겠다'는 동기를 부여하게 되는 거죠. 또 하나 흥미거리였던 저와 전호관 현대감독의 경쟁의식을 이을 라이벌이 탄생하지 않은 것도 배구침체의 한 원인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는 이탈리아에서 다이내믹한 경기로 팬들을 열광시키고 온 김호철 감독이 대표선수시절 함께 세터를 한 신치용감독과 현대-삼성의 라이벌 시대를 열어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

이창호감독의 제자는 70년대의 김영자 조혜정 박인실 부터 김화복 곽선옥 이운임 한경애 박미희에 이르기까지 화려하기 그지 없다.

"이운임은 종로구 어머니배구단 감독겸 선수이고 김화복은 분당, 곽선옥은 일산에서 계속 배구를 하고 있어요. 박미희는 신문기자인 남편을 따라 1년간 중국에 갔고, 조혜정은 엊그제 대구에서 만났는데 냉면집을 열어 체인점까지 생길만큼 크게 성공했어요."

그는 왕년의 스타들이 주위 사람들을 경기장으로 끌고 나오는 배구사랑을 보여야 배구가 빨리 옛날의 영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이 일에 앞장 설것이라고 약속했다.

1984년 3월 25일● 배구대회 사상최다 관중

배구경기도 잠실체육관이 터져 나갈 정도로 관중을 모은 적이 있었다. 84년 3월 25일의 제1회 대통령배 전국남녀배구 대회(현 슈퍼리그) 결승전. 80년대 배구명가 고려증권이 장윤창 유중탁을 앞세워 이종경 신영철의 경기대를 3-0으로 누르고, 박미희 이운임의 미도파가 이은경이 리드하는 숙적 현대에 3-2의 대역전극을 펼친 날이다.

남녀 각 10개팀이 출전해 1월 14일부터 8개도시를 순회하며 벌인 원년대회는 하루 평균 6,000명이 몰릴 만큼 관중들의 호응이 폭발적이었다. 특히 지방은 거의 매일 만원을 기록.

동시에 점보시리즈를 창설한 농구가 시리즈를 3차로 나눠 매번 우승자를 가리고 마지막에 다시 챔피언 결정전을 열어 현대-삼성전등 빅경기를 최대한 늘리는 방식으로 팬서비스와 흥행에 모두 재미를 본 반면 대한배구협회는 영원한 라이벌 현대와 미도파가 70일간의 예선리그 중 한번도 만나지 않고 최종결승에서 단판으로 정상을 가리는 우직(?)한 대회 방식을 시행, 팬들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아무튼 라이벌전에 대한 갈증때문인지 잠실체육관에는 이날 79년 개관이래 최다 관중이 몰려 2만 여명이 입장하고 많은 팬들은 표를 못 사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관중의 열기에 보답하듯 2시간 여의 여자부 결승은 박진감이 넘쳤다. 현대가 15-7 15-5로 먼저 두 세트를 따내 쉽게 승리하는 듯 하던 경기는 벼랑끝에 몰린 미도파의 악착 같은 수비로 2-2 타이가 됐고, 마지막 5세트에서도 현대가 5-0으로 치고 나가자 미도파가 8-5로 뒤집고, 다시 8-8에서 미도파가 15-10으로 달아나는 대혈전이었다.

양팀의 사령탑도 숙명의 라이벌. 번갈아 대표팀을 7,5번씩 맡았던 미도파 이창호 감독과 현대 전호관감독의 작전싸움과 일희일비하는 모습은 선수들 대결 못 지 않게 손에 땀을 쥐게 했다.

결국 다음 해에는 패권이 현대에 넘어갔으며 두 팀의 정상 다툼은 호남정유가 정상에 등극하기 전까지 7년간 계속됐다.

1979년 3월 18일● 박찬희 세계타이틀획득

127전 125승의 화려한 전적을 안고 프로로 전향한 박찬희는 냉정하고 침착한 테크니션이었다. 빠른 발놀림과 속사펀치는 아마추어에서 그에게 74아시안게임 금메달과 76킹스컵 최우수선수라는 영예를 안겼다. 하지만 고대했던 몬트리올올림픽 8강에서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뼈아픈 패배를 당하고는 아마무대에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79년 3월 18일, 당시 동아대 4년생이던 박찬희는 홈링인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아마추어 세계정복 실패의 한을 푸는 WBC 플라이급 세계타이틀전을 가졌다. 프로전향 1년 7개월, 겨우 10경기를 치른 끝에 맞는 행운.

상대는 타이틀을 무려 14차례 방어한 백전노장 미겔 칸토(멕시코). 22세와 31세의 대결이었다. 박찬희는 초반부터 안면 뿐 아니라 복부 옆구리를 두루 노리는 선제공격으로 주도권을 잡았고, 심판전원일치의 판정승을 거두었다. 패기 뿐 아니라 테크닉도 오히려 좋았다. 다만 마무리를 할 펀치력이 없는 게 아쉬움이었다.

박찬희는 이후 국내 최다 방어 기록였던 3방을 넘어섰다. 전 WBA 동급챔피언 구티 에스파다스(멕시코)를 세번이나 다운시킨 끝에 2회 KO승을 거둔 것.하지만 그는 80년 5월 서울의 6차 방어전서 오구마 쇼지(일본)에게 9회 TKO로 무릎을 꿇었다.

5개월 뒤 일본 센다이로 건너 가 오구마와 리턴매치를 가졌으나 1회에 다운을 뺏고도 1-2로 판정패. 박찬희는 판정에 이의를 제기, 재경기 기회를 얻었지만 81년 2월 열린 오구마와의 3번째 대결서도 다 잡은 경기를 끝내지 못하고 9회 이후의 현저한 체력저하로 다시 판정패를 감수해야 했다. 박찬희는 아무리 체력을 단련해도 10회가 넘어가면 급전직하 하는 스태미너와 펀치력의 부족이 극복할 수 없는 약점이었다. 그는 결국 귀국후 입원, 요추 부상과 신장이상의 판정을 받고 은퇴를 선언했다.

1989년 3월 19일● 배드민턴 최고의 별

한국 배드민턴 사상 최고의 스타 박주봉이 89전영오픈에서 스웨덴조를 제압, 일본오픈 스웨덴오픈에 이어 그 해 3대오픈을 휩쓸었다.

이 대회서 박주봉은 이상복과 한조로 남자복식, 정명희는 정소영과 여자복식도 석권해 각각 2관왕. 25세의 동갑인 박주봉 정명희는 모두 장신에 스피드와 스매싱이 뛰어난 공격력을 갖춘 선수. 이 해 6월 세계선수권대회 혼합복식 패권도 차지한 이들은 91년까지 전영오픈의 혼복을 3연패했다.

혼합복식이 92올림픽 종목으로 못들어가 남자복식만 치지했던 박주봉은 93년 은퇴했다가 95년 복귀한 후 후배 라경민과 국제대회에서 승승장구, 혼합복식이 채택된 96년 올림픽에 나가 은메달을 획득했다. 그의 금메달 꿈에 제동을 건 결승상대는 후배 김동문-길영아였다.

박주봉은 97년 영국대표팀 코치, 99년 말레이시아 대표팀 코치를 맡고, 곧 아테네 올림픽을 앞둔 한국대표팀에 코치로 합류할 예정이다. 정명희도 여자대표팀에서 코치를 맡고 있다.

유석근 편집위원 sk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