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재벌 체제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삼성을 비롯한 일부 그룹이 기존의 경영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해 LG가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데 이어 SK도 최근 계열사별 독립체제로의 변신을 선언했다. 강력한 오너십을 바탕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했던 한국식 기업지배구조 방식이 주주가 중심이 돼 투명 경영을 강조하는 서구식 기업지배구조의 영향을 받으며 실험대에 오른 셈이다.삼성·LG·SK 서로 다른 지배구조
지난해 3월 구조조정본부를 해체하고 (주)LG를 지주회사로 출범시킨 LG는 계열사 46곳 가운데 금융 관련사를 제외한 37곳이 자회사로 편입된 지주회사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SK도 최근 계열사별 독립체제를 선언했다. '브랜드와 기업문화를 공유하는 독립계열사 네트워크'라고는 하지만 최태원 회장이 경영에 관여하는 SK(주)가 사실상의 지주회사 역할을 할 것으로 보여 전통적 오너경영과 지주회사 방식의 중간쯤에 해당한다.
반면 삼성은 아직도 계열사간 순환출자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계열사간 상호출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가운데 대주주가 비상장사인 에버랜드를 통해 다른 계열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방식이다. 에버랜드가 사실상 지주역할을 하고 있는 셈.
기업지배구조의 변화는 결국 의사결정 방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LG와 SK의 경우 과거 수직적이었던 계열사 조직이 계열사 독립경영이 축을 이루는 수평적 연합체로 변모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을 정점으로 구조조정본부와 각 계열사 경영진이 양축을 이루는 '삼각편대'의 경영시스템을 갖고 있다. 이 회장이 장기 비전을 제시하면 각 계열사 전문경영인은 경영을 책임진다. 구조본은 경영환경 변화에 대한 조기경보를 울려주고 계열사간 사업조정 등 중재에 나서는 역할을 맡는다.
어떤 시스템이 효율적인가
한국 재계에 불어 닥친 경영 시스템의 변화는 외환위기 이후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진 것도 한 요인이지만, 각 그룹의 경영권 이양과 상속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됐다는 분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 한국경제연구원 이수희 박사는 "삼성은 후계 과정을 지휘할 구조본이 필요해 과거 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LG는 대주주간의 지분정리를 위해 지주회사 체제를, SK는 취약한 지배구조를 방어하기 위해 과도기적 방식을 각각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식의 경영 방식이 효율적인지는 아직 의견이 엇갈리는 상황이다. 오너 중심 방식은 신속한 의사결정과 장기적인 투자를 할 수 있는 것이 장점. 삼성이 5년, 10년을 내다보고 반도체, LCD 등에 장기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런 이유다. 하지만 오너 중심의 경영은 외부 충격이 가해졌을 경우 그룹 전체가 통째로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LG그룹이 카드 사태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로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을 꼽는 전문가들도 많다.
고려대 장하성 교수는 "카드사태를 처리하는 방식에서 삼성과 LG의 지배구조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났다"면서 "LG는 계열사들이 직접 돈을 넣지 않았던 반면 삼성은 아직도 직접적으로 돈을 넣을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이라고 지적했다.
삼성 구조본 김준식 상무는 "기업마다 처한 사정이 다른데 무조건 지주회사 체제를 강요하는 것은 시장원리에 맞지 않다"며 "기본적으로 주주들이 어느 체제가 효율적인지를 판단해 실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한화증권 이종우 리서치센터장은 "계열사에 경영간섭이나 부당지원을 할 수 없는 지주회사 체제를 선택한 LG가 이론적으로는 가장 선진적"이라면서도 "하지만 경영은 현실이며 이론과 현실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박천호기자 toto@hk.co.kr
유병률기자 bry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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