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MBC)에서 왕의 역할은 고작 이렇다. 끼니 때마다 상궁들이 음식을 가져오면 "맛이 참 좋구나" 한 마디 평을 해 주고, 때로 궁을 거닐다 마주친 울고 있는 궁녀에게 승은을 내리기도 한다. 대신들과 격론을 벌이는 주제라고는 최고상궁 자리에 누가 오르느냐 정도이고 게다가 늘 시름시름 아프다. 왕위계승과 권력찬탈을 주로 다룬 기존 사극에서와 달리 대장금에서 왕은 조역일 뿐이다.'대장금'이 23일로 막을 내린다. 제작진은 '조선 중종 때 장금이라는 의녀가 있었다'는 단편적인 기록에서 시작, 궁녀 의녀 등 궁궐 여성을 사극의 주인공으로 끌어올려 상상력을 불어 넣고 살을 입혀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사극 한 편을 시청자에게 선물했다. 방영 초반부터 줄곧 시청률 1위 자리를 고수했고 대장금 브랜드를 상품화 하는 등의 방법으로 MBC는 250억원 이상의 수입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눈으로 보이는 것 외에 '대장금'이 남긴 것은 무엇이 있을까.
그녀들의 이야기, 'Herstory'
"사람들은 여성이 어떤 노력을 기울여 성공을 이뤄 냈는지 그 과정을 보기 싫어하는 것 같다"는 한 여성의 말처럼 TV 속 성공한 여성은 처음부터 배경 좋고 능력 있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이가 대부분이다. '대장금'의 특별함은 역사의 만년 조연이었던 여성, 그것도 역사의 변두리에 서 있던 궁녀의 성공 히스토리를 충실하게 담아낸 여성주의적 시각에 있다.
'대장금' 속 여성은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적극적이다. 주인공 장금은 어머니의 억울함을 풀고 최고상궁이 되겠다는, 후에는 한상궁의 억울함을 풀고 최고의 의녀가 되겠다는 확고한 목표를 세우고 한 발 한 발 노력해 간다.
장금 뿐 아니라 '대장금' 속 여성 인물은 각자의 성격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집안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남성들과 손을 잡으며 치밀하게 행동하는 최상궁, 장금의 재능에 대한 시기와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질투로 고뇌하지만 결국 "완벽히 집안의 사람이지도 못했고 완벽히 나 자신의 주장을 갖지도 못했다"고 털어 놓는 금영 등 '대장금' 속 악녀는 지극히 인간적이다. "숨소리도 내지 말고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인생 목표인 민상궁, 제 한 몸 보전하기 위해서 힘 있는 자라면 누구에게든 고개를 숙이는 영로 등 어느 역 하나 죽어 있는 캐릭터가 없다.
'가장 이상적인 여성 리더십'이라는 찬사를 들은 한상궁과 장금의 관계는 '대장금'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처럼, 동료이면서도 서로를 시기하는 여―여 관계가 대부분인 드라마 속에서 선배가 후배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고 이끄는 한상궁은 가장 큰 호응을 불러 일으킨 인물이었다.
상상력의 극대화, 사극 아닌 현대물
후반부에 오면서 문학적 상상력에 의존해 이야기를 맞춰가다 보니 초반의 견고한 짜임새는 조금씩 흐트러져 갔다. 권력 암투가 수면 위로 떠 오르면서 갑자기 '여인천하'(SBS)를 보는 듯 하다가, 사건을 해결하는 데 민정호의 도움이 너무 커진 나머지 '사극판 신데렐라'로 흐르기도 했다. 멜로, 추리, 음식 이야기 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던 수라간 시절의 서사성은 종영 시간에 쫓겨 상당 부분 없어지고 대신 호흡 짧은 추리극처럼 변질된 것이 사실이다.
장금의 영웅적인 면을 부각하기 위해 시대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에피소드도 연달아 등장했다. 의녀가 감히 대비에게 내기를 걸고 왕에게 소원을 줄줄이 털어 놓는 등 조선의 신분제도상 있을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장금이 병부일지를 꺼내 오거나 민정호의 배려로 마음대로 옥에 드나드는 등 툭하면 규율을 무시했다. 때문에 시청자의 역사의식을 왜곡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혹자는 "'대장금'은 역사드라마이면서도 정서상 현대물이라 역사적 고증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혼자 모든 난관을 능수능란하게 해결하는 장금의 초인적인 모습은 여성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모든 여성의 바람인 동시에 건전한 영웅에 대한 대중의 기대 심리를 반영한 것이다. 천하디 천한 의녀를 능력 있는 여성으로 그린 것도 여의사에 대한 현대적인 시각이 개입된 결과다. 즉, '대장금'은 사극이면서도 지금 숨쉬고 있는 대중의 바람과 의식을 담아 내고 있다. .
'대장금'에 대한 이야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장금을 도덕적으로 한치의 결함이 없는 너무 이상적인 여성으로 그려 내서 성공한 여성은 아무런 흠이 없어야 한다는 편견을 안겨 줄까 걱정된다"('이프' 정박미경 편집장)는 우려도 있다. "시대상황에 맞지 않은 설정으로 조선시대의 역사상을 왜곡시킬 부분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일반 대중이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했다. 왕이 아니라 다른 입장에서도 역사를 볼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운 점은 높이 살 일이다"(서강대 사학과 강사 김아네스)고 후한 점수를 매기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숱한 옥에 티도 사극의 새 지평을 연 '대장금'에 대한 평가를 훼손할 수준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다.
/최지향기자 misty@hk.co.kr
■ 연생이(박은혜)
징징거리는 목소리로 걸핏하면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연생이는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성공욕구가 강한 '대장금' 속 여성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수동적이고 고전적인 여인상이다. 승은을 입어 인생이 하루 아침에 달라지는 연생이는 온갖 고난을 겪어 낸 후에야 원하는 바를 이뤄내는 장금이와 비교할 때 역시 '인생 한 방'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하는 셈.
■ 민상궁(김소이)
모든 여성들은 출중한 능력에, 헌신적인 연인까지 갖춘 장금이를 부러워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민상궁처럼 살아간다. 후반부 민상궁의 인기가 상승한 것도 그 닮은꼴에 애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최대한 몸을 낮춰 탈 없이 살고 싶어 하는 민상궁이 이전의 정상궁, 한상궁, 최상궁 등이 온갖 고난을 이겨 내며 지켜 온 최고상궁 자리에 어부지리식으로 오르는 설정은 99% 평범한 여인들에게 대리만족을 안겨준 진정한 판타지였다.
■ 영로(이잎새)
영로의 죽음에 연생은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영로는 최상궁 일가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장금을 괴롭히는 얄미운 역이지만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충성심이 있어서도 아닌 단지 제 한 몸 건사하기 위해 결국에는 장금에게도 몸을 조아리는 박쥐형 인간 영로의 모습이 악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권력의 떡고물 맛에 마약처럼 빠져 들고만 평범한 이의 처량한 모습이다.
●재방·인터넷 다시보기 탓 "허준" 시청률은 못넘어
장금이는 왜 '허준'에게 약할까?
'대장금'이 중반부터 시청률 상승 행진을 계속하면서 역시 이병훈 PD가 연출했던 사극 '허준'이 세운 역대 최고 시청률 기록 64.4%를 깰 수 있을까에 관심이 집중됐었다. 2일 최상궁이 죽음을 맞는 48회에서 56.8%로 최고 시청률을 경신했지만 앞으로 2회만이 남은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역대 최고 시청률 기록을 깨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허준'에 못지 않은 탄탄한 구성을 바탕으로 전국민적인 인기를 끌었으면서도 '대장금'이 '허준'의 기록을 깨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방송계 관계자들은 TV 시청 환경이 '허준'을 방송했던 2000년과 다르다는 점을 든다. 인터넷을 이용한 VOD 다시보기가 보편화 하면서 정규 방송시간에 TV 앞으로 몰려드는 시청자가 분산됐다는 것이다.
때문에 '대장금'의 최고 시청률이 허준에 비해 10% 가량 떨어진다 하더라도 인터넷 iMBC를 통해 '대장금'을 다시 보는 회수가 하루 평균 2만 건을 웃도는 것을 감안하면 결코 뒤쳐지는 시청률이 아니라는 분석이다. 게다가 MBC 계열의 케이블 방송인 MBC 드라마넷를 통해 매주 화, 수요일과 주말에 하루 2차례씩 내보내는 '대장금' 재방송은 평균 시청률 2.5%로 케이블 방송 최고 시청률 기록하고 있다.
'대장금'은 최고시청률에서는 '허준'에 밀렸지만 평균 시청률은 '허준'을 뛰어 넘었다. '허준'이 시청률 20%대에서 시작해 중반부터 시청률이 급상승,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데 반해 '대장금'은 방송 불과 4주만에 시청률 1위에 오른 이후 5개월간 줄곧 1위 자리를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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