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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숙려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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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숙려기간

입력
2004.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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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이상을 끌어 온 안양 충훈고 사태가 간신히 해결됐다. 이 학교에 다니기 싫은 학생들은 일단 충훈고에 등록한 뒤 권역 내의 다른 학교로 전학할 수 있게 됐다. 관계법상 학교 재배정은 불가능해 교육당국과 학부모들이 이렇게 합의했다고 한다. 해마다 그래왔던 것처럼 공사도 끝나지 않은 학교에 신입생들을 배정했다가 교육당국은 이번에 된통 수난을 당했다. 전학 허용의 기준이 되는 사유는 '학교 부적응'이라고 한다. 사표를 낼 때 흔히 쓰는 '일신 상의 사유'라는 말처럼 애매하지만 이 경우 꽤 정확한 말처럼 보인다.■ 이혼을 할 때 내세우는 대표적인 사유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은 '성격차'다. 잘잘못을 가릴 사연이야 많지만, 시시콜콜한 일까지 드러내기 어려워 이처럼 애매한 이유를 대게 된다. 성격차가 크면 오히려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한데, 실제로는 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부부가 많다. 요즘처럼 이혼을 쉽게 해버리는 세상에서는 굳이 성격차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루 840쌍이 결혼하고 398쌍이 이혼할 만큼 한국의 이혼건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 됐다. 주변에서 돌총(돌아온 총각) 돌처(돌아온 처녀)를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다.

■ 복지부가 3∼6개월의 이혼 숙려(熟慮)기간을 법에 정하기로 한 것은 충동적인 이혼에 제동을 걸어 급속한 가정해체를 막아 보자는 취지일 것이다. 그런데도 끝내 헤어져야겠다면 재산분할 자녀양육등 이혼 후의 문제에 관한 세세한 합의를 함으로써 평화적 이혼을 유도하자는 것이다. 정부의 개입은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지만, 거꾸로 행복 추구를 위해서도 숙려기간은 필요하다. 미국 캐나다 등은 숙려기간에 갖가지 프로그램을 적용해 이혼자체를 매우 어렵고 피곤하게 만들어 놓았다.

■ 중요한 것은 무슨 일에든 숙려기간의 취지를 살려야 한다는 점이다. 학교를 열기 전에, 사표를 내기 전에, 이혼을 하기 전에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자칫하면 학교는 충훈고처럼 공동화하고 자녀들이 피해를 당한다. 탄핵을 저지른 국회나 원인을 제공한 대통령이나 헌법재판소는 물론, 일반 국민들까지 한국인들은 지금 숙려기간의 한 복판에 서 있다. 영어로 Cooling-off period인 숙려기간은 그야말로 냉각기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학교 부적응, 성격차와 같은 애매한 사유로 문제를 처리할 수는 없다. 숙려기간에는 냉정해야 한다.

/임철순 수석논설위원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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