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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한국전 유해 발굴담당관 박인영씨의 끝나지 않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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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한국전 유해 발굴담당관 박인영씨의 끝나지 않은 전쟁

입력
2004.03.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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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발굴 현장에 선 한 노인의 회상을 좇는다. 이미 화석(化石)화 한 반세기 전의 비극이 유해와 유품 앞에서 현실로 생생하게 되살아 난다. "…돌아온다고 약속했잖아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왜 이러고 있어요. 오십년 동안이나 기다렸는데…. 형, 형…." 칠순이 된 동생이 오열하는 마지막 장면은 어지간히 감성 무딘 관객의 눈에서도 눈물을 쏟게 만든다.영화가 그려낸 유해발굴 사업은 한국전 5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동안 실제로 진행된 일이었다. 때늦긴 했으나 산야에 이름 없이 버려진 전몰자들에 대해 국가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던 사업이었다. 국방부 유해발굴담당관 박인영(朴仁榮·52·당시 육군 중령)씨는 처음부터 유해발굴 사업을 기획, 입안하고 3년간 작업을 총지휘해온 사람이다. 박씨의 발굴팀은 그 동안 유해 933구를 찾아내 그 중 30여명의 신원을 확인하고 유족을 찾아냈다. 한편의 영화가 새삼 일깨워 준 전쟁의 비극을 그를 통해 다시 들었다.

박인영씨는 원래 역전의 야전장교 출신이다. 1975년 ROTC 소위로 임관 직후 전북 임실에서 무장공비를 사살하고, 90년 대대장으로 전방근무 때는 휴전선 제4땅굴을 발견해내는 수훈을 세워 언론의 주목도 받았다. 그런 그가 99년 국방부에 설치된 '6·25 50주년 기념사업단'으로 배속되면서 한국전 전몰자 유해발굴과 인연을 맺었다. 하와이에 근거를 둔 '미 육군 중앙유해감식소(CHILHI)'가 단 한 구의 전사자 유해를 찾기 위해 북한을 포함, 전 세계 참전지역을 무기한으로 누비는 모습이 부러워 오랫동안 흉중에 담아온 일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누구도 전몰자들의 유해발굴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심지어 그 긴 군사통치 기간 중에도(솔직히 당장 돈이 되거나, 진급에 도움되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아무런 전범(典範)도 없이 백지상태에서 시작한 유해발굴은 그래서 보통 지난한 작업이 아니었다. 사전 준비에만도 반년 이상이 소요됐다. 우선 한국전쟁을 초기전투, 낙동강 방어전, 반격작전, 휴전협정 기간의 고지전투 등 네 시기로 구분해 대표적인 격전지 58곳을 추려냈다. 수많은 공식, 비공식 전사(戰史)와 자료를 뒤져 각 전투지역에 투입된 병력, 배치선, 상세한 전투상황 등을 파악한 뒤 현장을 답사하는 일을 숱하게 반복했다. 칠순, 팔순의 참전용사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그 때 내가 전우를 어디에 묻었다"는 등의 증언도 최대한 수집했다. 그러나 많은 지역은 이미 옛 산천이 아니었다. (가령 서울의 신촌이나 여의도 등지도 치열한 격전지였다) 그렇게 해서 최종 선정된 지역이 29곳.

"불과 다섯 정도의 인력에 지도와 낫, 나침반 정도의 장비만 갖추고 매일 새벽부터 밤까지 전국의 산하를 뒤지고 다녔습니다. 눈 비에 젖고 비탈에서 굴러 다친 일은 부지기수지요. 여름에는 벌레와 독초로 피부가 온통 성한 곳이 없을 정도였고…." 지형과 산세를 살펴 유해가 있을 법한 곳을 정확히 집어내는 능력은 웬만한 지관(地官)과 견줄 바가 아닐 정도가 됐다. "나중에는 나무만 보고도 척 알 정도가 됐지요. 비슷한 연륜에 나란히 자란 같은 수종(樹種)이라도 시신이 묻힌 곳의 나무는 두드러지게 큽니다. 전사자의 살과 피가 양분이 된 것이지요."

특히 피아간에 치열한 섬멸전이 벌어졌던 참호를 찾아내는 일은 중요했다. 당시의 전투란 게 대개 고지 쟁탈전이어서 참호는 대부분 산 꼭대기 능선을 따라 있었다. 키를 넘는 잡초들을 헤쳐가며 찾아낸 전투호, 교통호들의 깊이는 고작 10㎝ 남짓. 오랜 풍상으로 메워졌음을 감안하더라도 채 몸뚱이하나 가리기 힘들었을 깊이는 매 전투상황이 얼마나 긴박하고 다급했었는지를 가늠케 했다. 사실 적의 예상 이동로나 전술적 요충지 등을 집중 방어 타격하는 현대의 작전개념으로 보면 이런 식의 참호 설치는 매우 비효율적이고 무모한 것이었다. 하기야 모두가 경험도, 대비도 없이 창졸간에 전쟁에 휘말렸던 그 때 무슨 고도의 전술개념이란 게 있었으랴.

(채병덕·蔡秉德 전 육군참모총장이 50년 7월 경남 하동 전투 때 안개 속에서 미지의 병력과 조우하자 권총을 뽑아들고 나서 '적이가, 아군이가?'하고 묻다 집중사격을 받고 전사한 일도 있었으니)

"현장에 표식을 세우고 바둑판 모양으로 땅 구분을 짓고 나면 천신(天神)과 지신(地神)에게 땅을 열겠다고 고하는 개토제(開土祭)를 올린 뒤 본격적인 발굴작업에 들어갑니다. 인근부대에서 지원받은 군 병력이 나서 일단 부엽토를 걷어내면 전문 학자들이 고고학 유물을 발굴하듯 붓으로 흙을 쓸어가며 유골과 유품을 찾아내는 거지요." 안전문제에도 최대한 신경을 써야 했다. 지뢰나 불발탄 따위에 의해 희생이 날 수 있으므로. 참여한 민간인들은 전원 보험에 들도록 했다. 사전에 지뢰탐지기로 샅샅이 현장을 훑는 과정에서 계급장과 단추 따위의 유물들이 상당수 나오기도 했다.

경북 칠곡의 작은 마을 다부리(多富里)는 한국전 당시 낙동강 방어선의 축으로 1950년 8월 한국군 1사단이 북한군 2군단(3개 사단)과 맞붙었던 그 유명한 '다부동 전투'의 현장이다. 당시 한국군은 중과부적의 병력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도 이 곳을 방어해냄으로써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이어지는 반격의 전기를 마련했다. 당연히 초기 주요발굴지역의 하나였다. 첫 발굴에 들어간 직후인 2000년 4월 예상대로 다수의 유골과 유품들이 나왔다. 그 중 한 두개골 아래 삭아 없어진 군복 윗주머니 위치에서 작은 삼각자가 발견됐다. '최승갑'이라고 새겨진 이름이 또렷했다. 육군본부 전사자 명부에서 그를 확인한 뒤 전국을 뒤져 유족을 찾아냈다. 신혼 때 군에 보낸 남편의 전사통보를 받고는 얼마 뒤 재가한 그의 아내, 그리고 그 때 친척집으로 보내져 외롭게 자란 외동딸은 50년 만에 마주한 옛 남편, 아버지의 유골 앞에서 속절없는 세월을 탓하며 통곡했다. 바로 이 장면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됐다. (강제규 감독은 당시 TV 특집물을 통해 이 광경을 지켜보다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다. 영화에서 삼각자는 만년필로, 최승갑씨는 배우 장동건이 분한 형 이진태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렇게 신원확인을 할 수 있는 단서가 나오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가장 확실한 증표가 될 금속제 인식표는 아예 단 한 개도 발견되지 않았다. "병력 충원과 보급이 엉망이었던 거지요. 영화에 묘사됐던 대로 젊은이들을 마구잡이로 데려가 채 훈련도 시키지 못한 채 총만 들려 급하게 전선에 투입했던 겁니다. 북한군도 마찬가지였지요. 닥치는 대로 현지 청년들을 소위 의용군으로 잡아갔으니까. 그래서 낙동강 전투 같은 경우는 남쪽 청년들끼리의 싸움이라는 말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니 유골들의 피아 구분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의미도 없습니다." 유골과 유물 한점 한점마다에 얽힌 그 사연들을 어떻게 일일이 다 소개하랴. 유전자공학자, 치의학자 등 전문가들과 첨단기법들이 동원된 확인작업에서도 끝내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대부분의 유골은 화장을 거쳐 국립묘지에 합봉됐다.

"그 동안 눈물도 참 많이 흘렸습니다. 유골을 보면 처절했을 전투상황, 그 안에서의 인간의 모습들이 그대로 떠오릅니다. 포탄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 뼛조각들을 보면 제 몸이 찢겨져 나간 듯 아픕니다. 매번 발굴 전에는 반드시 목욕재계를 하고, 좋아하던 낚시도 끊었습니다. 생명을 빼앗는 일이니까요. 혹 부정탈까 봐 보신탕 같은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았지요. 발굴된 유골을 임시로 모시는 곳에도 24시간 보초를 세우고 매일 조총을 쏘아 최대한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 안타까운 희생을 국가가 이토록 오랜 기간 외면해왔던 데 대해 사죄하는 심정으로…."

평생 군인으로 살아온 이답게 단단해보이는 박씨도 이 대목에서는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스스로 박봉을 털어가며, 2∼3주씩 가족과 떨어져 혼신을 바쳐온 사업의 시한이 끝나면서 박씨도 훌훌 군복을 벗었다. "전몰자 유해를 찾는 일은 이렇게 일회성 행사 식으로 흐지부지 마무리할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국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해야 할 도리이자 끝까지 져야 할 의무지요." 긴 아쉬움과 안타까움만 그에게 남았다.

기억되지 않는 희생만큼 허망한 것이 있으랴. 더구나 희생을 바친 당사자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있는 죽음이라면.

혼란스런 탄핵정국의 와중에서 기사를 쓰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또한 오랫동안 우리 스스로가 마땅히 존중해야 할 가치를 존중하지 않음으로써, 급기야는 존중할 모든 가치를 상실해버린 데 대한 업보일 수도 있다는…. 글쎄, 지나친 견강부회(牽强附會) 일까.

/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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