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분이 아니었다면 대학도 포기하고 평생 농사짓고 살았을 겁니다."국내 대표적 성악가로 꼽히는 엄정행(61) 경희대 음대 교수는 오늘의 자신은 좌절의 시기에 만난 한 '귀인'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말문을 열었다. 경남 양산 출신인 엄 교수는 원래 운동선수였다. 중·고교(부산 동래고) 6년간 배구선수로 활약해 대학 진학도 그 방향으로 잡았다. 그러나 뜻밖의 벽에 부딪힌다. "1960년 12월 서울에 올라와 경희대 체육과에 입학 원서를 내려 하는데, 신장 173㎝의 배구선수는 받을 수 없다고 창구직원이 손사래를 치는 것 아니겠어요. 정말 황당하더군요." 엄정행은 부산에 계신 아버지께 급히 연락해 음악과로 지원학과를 바꾸었다. "아버지가 음악교사여서 어릴 적부터 노래는 웬만큼 부를 줄 알았거든요."
합격은 했지만 엄정행은 답답하기만 했다. 발성법을 배워본 적도 없고, 악보를 보는 법도 몰라 학교가 갈수록 멀게만 느껴졌다. 그럴수록 배구에 대한 미련은 더 강해져 배구부 연습장을 기웃거렸다. 하루 종일 영화관에 쳐 박혀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사실상 학교를 그만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1학년을 보내고 2학년에 올라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야말로 은사를 만나게 된다. 이탈리아 연수를 마치고 막 귀국한 음악과 홍진표 교수의 호출을 받은 것이다. "음정 박자도 맞추지 못한다고 망신 당하는 줄 알았죠. 그런데 뜻밖에도 칭찬을 하시더군요. 목소리가 아주 좋아. 노력만 하면 최고가 될 거야. 열심히 해라고요."
그날부터 엄정행의 학교 생활은 180도 바뀌었다. 모든 학생들이 사사하고 싶어하던 홍 교수에게 개인지도를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엄정행은 또 다른 난관에 부닥친다. 외국어 실력이 없어 외국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 없었던 것. 배구공만 갖고 중·고교 6년을 보낸 탓에 이탈리아어, 독일어는 물론 영어 조차 제대로 읽지 못했다.
"한가지 꾀가 떠오르더군요. 경희대와 담장 하나 사이에 있는 한국외국어대 학생들을 생각했죠." 엄정행은 외대 이탈리아어과나 독일어과 학생들의 자취집을 찾아 옆방으로 이사했다. "외대생들이 원서를 소리 내어 읽을 때 옆방에서 같은 책을 갖다 놓고 들었습니다. 조금 친해진 뒤에는 악보 가사를 들고 찾아 가 읽는 법을 배웠죠."
이런 노력 끝에 엄정행은 전국 대학생 콩쿠르에서 1등상을 받는다. 홍 교수는 그러나 '이제 시작이다'며 채찍질을 늦추지 않았다. 대학졸업 후 대학원 2년간, 또 대학원 졸업 후 2년간 홍 교수의 지도가 계속됐다.
그런 은사와 나중에 서먹한 관계에 빠진 적도 있었다. 홍 교수가 당뇨병을 앓아 거의 강의를 하지 못한 사실이 당국의 감사에 적발돼 곤경에 처하자 엄 교수는 자신이 재직하고 있던 청주여자사범대학으로 홍 교수를 모시고 자신은 경희대 교수로 가게 됐는데, 그것이 오해를 부른 것이다.
"제가 모교로 들어가기 위해 밀어낸 것으로 오해하시더군요. 한동안 뵙지도 못했습니다. 2년쯤 지나서야 진실을 이해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자신의 소중한 악보까지 제게 다 넘겨 주셨습니다."
오랜 투병 끝에 홍 교수는 79년 세상을 등진다. 엄 교수는 은사의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에서 3일 밤낮을 지켰다.
"혹시 제 노래를 좋아하는 팬들이 계시다면 홍 교수님께 고맙다고 해야 할 겁니다. 자포자기한 저를 훌륭한 성악가로 키워주셨으니까요."
/송두영기자 dy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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