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에 정해진 책무를 다함으로써 관리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겠다."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은 13일 자신의 역할을 이렇게 규정했다. 기자들에게 이 말을 전한 한덕수 국무조정실장은 "말 그대로 해석해달라"는 주문을 곁들였다.그러나 이 같은 언급에는 '헌법이 정한 권한'과 '관리자'라는 두 가지 상반된 포인트가 공존한다. 헌법에 따르면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직무에 복귀하거나, 후임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사실상의 대통령으로서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야당이 그에게 보내고 있는 전폭적인 지원을 감안할 때 공기업 인사권은 물론, 개각까지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반면 관리자로서 권한대행은 정치적이거나, 커다란 결정은 가능한 한 뒤로 미루면서 현상유지에 주력해야 한다. 현재 고 대행의 강조점은 후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14일 첫 외부 공식행사로 충남·북 폭설피해 현장 방문을 선택했다. 최근 가장 큰 이슈가 된, 폭설로 상처 입은 민심을 달래기 위한 행보였다. 13일에 첫 회의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한 것도 상징적인 조치다. NSC 의장은 대통령이다. 외교 안보 등 대통령 고유업무를 떠맡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다. 그는 당초 노 대통령을 만나기로 예정돼 있던 톰 리지 미 국토안보부 장관도 접견했다. 고 대행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친우(親友)인 리지 장관에게 "이라크 파병을 기존 계획대로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고 말하는 등 미 정부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탄핵결의 당일인 12일 첫 조치로 이헌재 경제부총리를 집무실로 부른 것을 감안하면, 고 대행은 경제 외교 내치의 순서로 빈틈없이 행정수반으로서의 권한을 접수해 나가고 있다.
총리실 관계자는 "현재 24개 부처 중 9곳까지 진행되고 잠정 중단된 각 부처 업무보고도 순서대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고 대행은 정부 인사와 정치적 논란이 있는 정책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시간을 갖고 결정을 미루리라는 관측이 많다. 당장 국회에서 보내 온 사면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여부도 결정되지 않았다고 주변에선 말한다. 총리실 관계자는 "인사문제를 비롯해 어떻게 국정을 운영할 것인지 여론을 수렴하고 있다"며 "이번 주중 고 대행의 입장표명이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대통령의 권한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면 할수록 노 대통령의 위상과 탄핵정국의 향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게 고 대행의 미묘한 처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가능한 한 관리자의 역할을 벗어나지는 않겠지만 권력의 누수와 공백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게 고 대행의 입장이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 청와대-총리 비서실 역학관계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출범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보좌했던 청와대 비서실과 고 대행을 보좌해 온 총리 비서실의 역학관계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최근 권오규 청와대 정책수석과 한덕수 국무조정실장이 논의해 마련한 큰 틀은 고 대행이 '1인 2역'을 하게 된 만큼 청와대는 대통령 권한대행 보필을, 총리실은 총리 보좌기능을 기존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이 13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경제·외교안보 관계장관회의에 잇따라 참석한 점은 이 같은 관계설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청와대와 총리실 모두 각 부처와의 업무연락 및 협조기능도 종전처럼 유지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에는 고 대행이 노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고려한 점이 반영됐다. 총리실측은 "외교적 의전행사 외에 고 대행이 청와대에서 업무를 보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NSC와 국무회의 등은 모두 정부중앙청사에서 개최키로 했다.
그러나 의례적인 역할분담과는 달리 고 대행의 직무수행 과정에서는 청와대 보좌진의 역할에 무게가 실리는 경우가 많을 것으로 보인다. 양측이 갖고 있는 행정력과 정보력의 차이 때문이다. 이 경우 양측간 업무 중복이 불가피하고 특히 지근거리에서 고 대행을 보좌해 온 총리실측의 소외감이 클 것으로 보여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당장 고 대행의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 주재 여부, 청와대 보좌진의 보고 체계, 부처별 업무보고 여부 등에 대해 양측 모두 "며칠 지나봐야 윤곽이 잡힐 것"이라며 즉답을 피하고 있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