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것은 짱가가 아니라 홍 반장이다. 유능한 강력계 형사의 이야기냐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동네 반장 얘기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 없이 나타난다 홍 반장’이라는 사상 유례 없이 긴 제목을 지닌 이 영화는 뭔가 틀에 박히지 않은 로맨틱 코미디를 꾀한다.영화가 주는 재미의 80% 이상이 홍 반장과 혜진이라는 두 남녀 주인공의 캐릭터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김주혁이 연기하는 홍반장은 특이한 인물이다. 능글맞은가 하면 쫀쫀한 구석도 있고, 누구와도 친한 것 같지만 의외로 절친한 친구나 애인은 없다. 그는 시골 마을에 묻혀 아등바등 사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온 몸에 10배로 체현하고 있는 인물이다. 세련된 도시 의사 출신 혜진은 그런 그에게 연정을 품지만 이 친구, 홍 반장은 그런 혜진의 마음을 그냥 느긋하게 지켜볼 뿐이다.
이쯤이면 이 영화의 의도를 쉽게 눈치챌 수 있다. 홍 반장은 혜진에게 다른 삶의 가치를 알려주는 백마 탄 왕자님이다. 그가 다른 백마 탄 왕자님과 다른 것은 세상에 우뚝 솟은 왕자님이 아니라, 세상에 묻혀 살아가는 보통 사람의 삶의 매력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김주혁과 엄정화는 철저하게 남녀 주인공의 에너지에 집중하는 이 로맨틱 코미디에 활기를 불어넣지만 문제는 이야기의 수순이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랑만큼 뻔하면서도 유혹적인 삶의 기술을 스크린에 옮기기란 이토록 어렵다.
‘아웃 오브 타임’은 재능 있는 감독 칼 프랭클린과 뛰어난 배우 덴젤 워싱턴이 두 번째로 만나 만든 영화다. 그들이 첫 번째로 호흡을 맞췄던 ‘블루 데빌’(1995년) 이후 꽤 시간이 흘렀지만 일취월장한 뭔가를 확인하는 재미는 없어도 여전히 수준급의 내공을 지닌 연출과 연기를 확인하는 즐거움을 준다.
칼 프랭클린은 양복 입지 않은 덴젤 워싱턴을 멋지고 풍부하게 묘사하는 감독이다. 내연의 관계에 있던 여인 때문에 궁지에 몰리는 지방 보안관을 연기하는 덴젤 워싱턴은 한 번 잘못 딛은 발걸음 때문에 인생이 낭떠러지로 곤두박질 치는 중년 남자의 모습에 긴박감을 실어준다. 덴젤 워싱턴 버전의 ‘보디 히트’라고 할까.
마이애미의 끈적끈적한 무더위 속에서 폭발할 것 같은 짜증과 혼란과 생존본능을 껴안고 인생을 잘못 산 피로를 이겨내려는 남자의 생존 분투기를 통해 ‘아웃 오브 타임’은 범죄 누아르 영화의 단골 소재인, 여자 때문에 패가망신할 뻔하는 욕망과 배신의 풍속도를 흥미롭게 끌고 나간다. 이 영화는 최근 다소 경력의 소강상태에 빠진 덴젤 워싱턴과 칼 프랭클린 모두에게 어떤 전환점을 시사하고 있다.
‘헌티드’는 ‘영화감독은 일생에 단 한 편의 영화를 만든다’는 작가주의의 유명한 격언을 무색하게 만든다. 거장의 범작은 신인 감독의 걸작보다 나으며 범작이라 할지라도 궁극에는 그의 대표작과 통하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절대적인 믿음에서 나온 그 말을 윌리암 프리드킨 감독에게 적용하는 건 무리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젊은 나이에 ‘프렌치 커넥션’ ‘엑소시스트’ 등으로 벼락 출세했고, 미국 영화사에 남는 기교파 연출가로 이름이 높았던 프리드킨은 전성기가 지난 후에는 가끔 감독의 이름을 다시 확인하게 만드는 영화를 내놓는다. ‘헌티드’는 토미 리 존스와 베니치오 델 토로라는 당대 할리우드의 우수한 성격파 배우를 주연으로 기용해 살인기계가 된 옛 부하와 대결하는 남자의 모습을 담은 액션 영화지만 기교를 빼면 음미할 만한 여운이 공허하다. 역시 영화는 기교로만 만드는 게 아니다.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4-03-11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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