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막역한 벗이 돼 만년을 의지하며 살고 있다."현대문학 2월 호에는 장순하 시인 특별 대담이 실려 있다. 대담에서 그는 나와의 만남을 설명한 뒤 이렇게 말했다. 장 시인은 1981년 가을 알로에를 계기로 인연을 맺었다. 그는 당시 "그 동안 수집, 연구해온 모든 약초를 치워버리고 알로에만 키우기로 했다"는 신문 기고를 썼다. 민간 약초 전문가이기도 한 그는 그 이유를 알로에란 약초 한 가지로 관절염 등 지병이 말끔히 씻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기고를 계기로 우린 서로 환갑을 코 앞에 둔 나이에 처음 만났다. 그리곤 오랜 벗처럼 허물없이 지내고 있다.
그와 만난 이후에도 내 삶은 참으로 굴곡이 심했다. 회사가 무너지고 다시 일어난 뒤에는 세무조사를 받았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칼 바람에 휘청댔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때는 두살배기 아들과 아내를 잃기도 했다. 그때마다 장 시인은 내 손을 꼭 잡아 주며 한 없이 큰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
"내가 시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온갖 풍파를 버티어 내고 있듯 김 선생도 알로에에 대한 사랑과 집념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격려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호가 사봉(史峯)인 그는 대담에서 희수(喜壽)를 맞은 기념으로 문학전집을 간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글 답지 않은 글을 손질해 책을 내자니 쑥스럽다. 시조집과 경시조집, 평론집, 수필집이 각 2권이고 일기와 서간도 모아 출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대쪽처럼 꼿꼿하면서도 특유의 겸손함이 배어 있는 어투다.
나보다 몇 달 뒤 태어난 그는 희수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올해 우리나이로 77세, 기쁜 나이라는 뜻의 이른바 희수에 해당된다. 그러나 77이라는 숫자에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 더구나 기쁜 나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한자의 칠십칠(七十七)을 세모꼴로 괴어 놓으면 기쁠 희(喜)자의 초서와 비슷하다며 말꾼들이 꾸며냈을 뿐이다. 한자를 거의 안 쓰는 한글 시대에서는 잠꼬대에 불과하다."
장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속뜻을 알 것 같다. 시간이란 관념이 있을 뿐 실체가 없다. 진행도 정지도 없으니 시작도 끝도 없다. 인식의 대상일 뿐 감지의 대상이 아니므로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것이다. 철학적인 얘기 같지만 쉽게 말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한때 유행 광고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희수의 나이에 엄청난 분량의 작품을 정리하고 있다는 그의 열정에 탄복했다. 10여년 전 그가 내게 보낸 '찬사'를 생각하며 얼굴이 붉어진다. 92년 6월 중국 광둥성의 김정문알로에 농장에 같이 갔을 때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김 선생은 알로에 사업에 기적을 일으킬 만한 분이다. 연구를 계속한다면 위궤양 특효약이나 알로에 항암제 등을 개발할 만한 발명가적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다. 반드시 인류에 공헌할 날이 있을 것을 기대한다."
그땐 정말 항암제라도 개발할 수 있을 만큼 자신 만만했다. 나름대로 노력도 했다. 그러나 그의 찬사와 기대는 여전히 머나먼 꿈으로 남아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깨닫고 계속 정진할 뿐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그는 또 나와의 만남을 두고 "빼빼 마른 작은 몸매에 주름살이 남달리 많은 얼굴의 이 사나이. 그러나 유순하고 호방스러우며 진실하고 인간을 뜨겁게 사랑하는 이 남자에게 나도 모르게 매료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칭찬이 지나쳐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다.
장 시인은 둘째 아들이 최근 가족을 데리고 미국 유학을 떠나 허전하다고 했다. 나도 자녀들이 저마다 분가해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이번 주말에는 그와 오랜만에 회포를 풀어야겠다. 맥주 한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개지는 나와 달리 그는 낮부터 말 술을 즐기는 주당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주량이 대수인가, 오랜 벗 장 시인과 만나면 나도 20대 청년의 기백과 용기를 되찾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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